브런치북 텃밭일기 03화

텃밭일기 #3, 20190531

by 전영웅

덥고 메마른 날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폭우가 내렸고, 태풍 바람 같은 강풍이 몰아쳤다. 2층 거실에서 바로 보이는 감나무의 가지들이 바람에 속절없이 휘청였다. 부러지지 않는 것이 대견했다. 물을 싫어하는 마당의 반려견도 집 안으로 꼭꼭 숨어들었다. 메마른 날들이 이어지니 거의 날마다 물을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폭우라도 비는 반가웠다. 빗물이 고이기도 전에 스며들고 빠지는 제주섬의 땅 특성상, 폭우가 온다고 해서 침수 같은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바람은 달랐다. 바람에 무언가가 날아가고, 무너지며, 꺾였다. 바람 때문에 하늘길이 막히고, 파도가 일어 바닷길이 막혔다. 바람은 섬 전체를 고립시켰다. 바람이 부는 동안엔 무사히 지나가기만 바랄 뿐,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모든 일은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그친 후에나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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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비는 여전히 많이 내렸다. 마당에 나가보니 바람에 날린 것들은 별로 없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텃밭에 키높이로 세워두었던 토마토 지주대가 무너져 있었다. 비가 그치면 지주대부터 다시 세워야겠구나 생각했다. 토마토 모종들이 다치지는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다른 작물들은 다친 것 없이 잘 버텨주었다. 이랑을 덮어준 덤불들도 바람에 날리지 않은 채 모습 그대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 끝에 어떤 난감함을 남길 지 두려웠던 매서운 바람은 생각보다 별 탈 없이 지나가 주었다. 가장 반가운 모습은, 낭창한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살구열매들이 모습 그대로 잘 버틴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거나 가지지 않으면, 걱정은 그만큼 줄어든다. 하는 일 때문에, 그리고 가진 것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쓰고 고민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가진다. 마음을 쏟으며 위안과 평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텃밭이 그렇다. 텃밭을 시작한 계기도 그저 재미나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손에 흙을 묻힐 것이라고는 마당 있는 집에 대한 로망 안에서나 조금 생각했을 뿐이었다. 마음이 무척 심란하던 때에 아내가 텃밭을 가꿔보는 것은 어떠겠냐고 제안했었다. 그래 보자며 시작한 텃밭이 12년째이다. 나는 이제 해마다 텃밭을 가꾸며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을 다스린다. 때로는 현실에 거리를 둘 수 있는 심리적 도피처이기도 하다. 텃밭을 가꾸면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냥 살기에도 고민거리들은 넘치는데, 나는 텃밭까지 가꾸면서 비에 바람에 마음을 졸이고, 메마름과 더딘 성장과 병듦에 걱정을 더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틈틈이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채 텃밭으로 들어간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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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오래 했다고, 걱정과 고민으로 마음을 쓴다고 그만큼 수확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만큼 가꾸고, 그저 열리는 만큼 거두어 먹는다는 마음으로 텃밭을 돌본다. 진딧물과 노린재들이 고추와 토마토를 점령하고, 나비들이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다가 낳은 알에서 애벌레가 나온다. 참새들이 깻잎 순을 다 쪼아 먹고, 거의 다 익은 귤과 살구들을 직박구리 녀석들이 쪼아놓아도 나는 그저 게으른 눈으로 둘러본다. 애써서 방제하거나 쫓아내지 않아도, 그렇게 나누어 먹어도 사람이 먹을 것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게으르니 오히려 땅은 건강해서, 잡초를 뽑거나 땅을 고르다 보면 장수 지네나 굼벵이, 지렁이들이 지천이다. 그런 모습들이 마음을 만족스럽게 한다.


토마토 지주대를 다시 세워주고 묶어주었다. 모종은 다친 것 없이 잘 버텼고, 열매 줄기에 파랗게 열린 토마토들도 떨어지지 않고 잘 버텨냈다. 3주 전 텃밭으로 이식한 흑수박 모종은 뿌리가 잘 자리 잡아 잎과 줄기를 키우고 있다. 접붙여 키운 일반 수박 모종을 두 개 사다가 옆자리에 심은 것도 자리를 잘 잡았다. 물외는 이제 첫 열매를 키우고 있었다. 공터에 퍼지라고 심어둔 딸기는 땅줄기를 곳곳에 뻗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의 무더움이 조금 버거웠는지, 맺힌 딸기 몇 개는 금방 말라 쪼그라들었다. 생강은 아직 덤불 사이로 순을 내지 않았다. 거칠게 할퀸 반나절을 보냈지만, 텃밭의 것들은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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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를 거둔 자리에 반려견 녀석의 대변과 잡초들을 섞어 만든 퇴비를 뿌려주었다. 집 뒤뜰에 쌓아 둔 덤불을 거두고 그 아래 썩어 쌓인 흙을 거두어 같이 섞었다. 그 위에 남은 유기질 비료를 섞어 바닥 흙과 잘 섞었다. 고구마를 심을 자리이다. 비 한 번 오고, 조금의 시간을 두면 알아서 잘 삭겠지 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정돈했다. 고구마 순을 샀다. 해남에서 건너온 순으로 밤고구마 호박고구마 순 반씩 섞었다. 집에 가져와서 양동이에 물을 담고 뿌리가 나온 줄기 끝을 담가뒀다. 이틀 후, 주말에 고구마를 심을 예정이다. 고구마 순 값이 작년에 비하면 2천 원 정도 가격이 내렸지만, 해마다 모종값이 전체적으로 오른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텃밭을 가꾸는 일도, 얼마간의 투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 되어간다. 마음의 평온을 위한 노동이라 생각하면 그리 비싸지 않은 비용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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