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텃밭일기 02화

텃밭일기 #2, 20190526

by 전영웅

3일 반 정도 집을 비웠다. 그 사이 많은 비가 왔었고, 집에 돌아온 날에는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있었다. 뿌리가 잘 자리한 것들은 이제 키를 키우고 있었다. 고추는 조금 커진 키에 윗줄기가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가지는 꽃을 피웠다. 콩들은 이파리가 점점 많아졌다. 깻잎은 벌써부터 꽃대를 만들고 있었다. 날이 갑자기 더워진 것이 맞나 보다 싶었다. 토마토는.. 말할 게 없었다.


곁순을 따 주었다. 깻잎의 곁순과 고추 가지의 곁순을 쪼그리고 앉아 다니며 따 주었다. 햇볕이 강해서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썼는데, 앉을 때마다 지주대에 걸려 벗겨졌다. 곁순을 따 주면서 지주대에 묶은 매듭을 줄기 위로 올려 추슬렀다. 토마토는 곁가지를 가위로 잘라주어야 했다. 성장 속도가 워낙 빨라서, 작은 곁순은 손으로 따 주어도 되지만, 불쑥 자란 곁가지는 가위로 잘라야 끊어졌다. 노랗게 꽃이 핀 열매 줄기가 달린 쪽을 놓아두고 다른 줄기는 싹둑 잘라주었다. 너무 빨리 자라서 매듭 위로 기다란 줄기가 바람에 휘청거렸다. 토마토는 해마다 열심히 곁가지를 자르고 매듭만 매어주다가 끝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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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과 물외의 첫 열매와 꽃들도 따 주었다. 전에는 그냥 두었는데, 첫 열매와 꽃을 따 주어야만 더 잘 자라고 많이 열린다는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따 주었다. 곁순이나 곁줄기를 잘라 줄 때엔 별 생각이 들지 않는데, 첫 꽃과 열매를 따 줄 때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결과적으로는 더 잘 자라고 더 많이 열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위안이 있지만, 성장통이라는 묵직한 고통을 일부러 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사실 곁순을 따 주는 것도 같은 목적이고 나름의 고통인데, 두 행위 사이에 미안함이 다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텃밭을 가꾸는데 나름의 철학이 있다면 방치 농법이었다. 그냥 놔두고 보자는 것인데, 해가 지날 때마다 잡초에 잠식당하고 노력에 비해 얻는 게 얼마 안 되니 가만있지 못했다. 제주에서 잡초는 순식간에 허리 높이로 자라 작물들을 뒤덮어버렸다. 잡초가 무성해지니 그 사이에서 꿩인지 산비둘기인지 모를 새가 와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날을 잡아 우리에게 할당된 텃밭을 뒤덮은 잡초를 뽑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잡초 덤불 속에서 신음하는 작물들을 구해내야만 했다. 텃밭이 집에서 차를 타고 5분 이상 가야 하는 곳에 있었던 예전의 일이다. 지금은 마당 한 켠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잡초를 뽑아주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으니 눈이 갈 때마다 몸이 움직여진다. 방치한다고 하지만, 밭을 가꾸는 일은 방치가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면 알아서 몸이 움직인다. 누군가가 조언한 재배요령을 듣고 나면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이 된다. 손이 갈수록 작물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 방치 농법이라는 철학은 노력 농법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우도땅콩의 싹이 올라왔다. 두세 개씩 싹이 올라온 녀석들을 솎아주었다. 줄기를 당기니 쑥쑥 뽑히는데, 뿌리 상태가 나쁘지 않아 그냥 버리기 아까웠다. 그래서 물에 좀 담가 둔 다음에, 텃밭 빈자리에 간격을 두고 심었다. 날마다 열심히 물을 주었더니 녀석들은 제법 잘 버텼다. 시들지 않고 이파리에 힘을 주어 펼쳤다. 다른 콩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자리에서 두세 개씩 올라온 싹을 솎아주어 버릴 것들에 괜히 마음이 아팠다. 뿌리가 많이 다쳐버렸다면 그런 미련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너무 양호해서 물에 반나절 담가두었다가 마당 공터 몇 군데에 나누어 심었다. 한동안 물을 열심히 주면서 ‘알아서 자라겠지.’ 놔두었는데, 죽은 녀석 하나 없이 모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하찮아 보였던 콩에게서 생명의 경외를 느낄 줄은 몰랐다.


집을 비우기 며칠 전, 창고에 있던 바질과 고수 씨앗을 마당 공터와 텃밭 가장자리에 뿌렸다. 포트에 심었던 바질은 발아에 실패했다. 바질 씨앗은 작년에 사 둔 것이었고, 고수는 작년과 재작년에 텃밭에서 씨를 받아 보관해 둔 것이었다. 날이 충분히 더워졌고, 큰 비도 지나갔으니 싹도 많이 올라오겠지 했는데, 좀처럼 싹이 보이지 않았다. 발아율이 많이 떨어져 그런 듯했다. 씨앗도 발아율이 있고 파종 시기도 있다. 해가 갈수록 발아율이 떨어지고 파종 시기도 맞지 않으니 묵혀둔 씨앗이 싹을 틔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바질 싹은 몇 개 보여서 충분히 자라면 조심히 캐내어 텃밭으로 옮겨 심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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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지자 고추에는 노린재가 보이기 시작했고, 토마토 줄기에는 진딧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독성 살충제를 묽게 희석해서 작물마다 뿌려주었다. 목초액이나 소변을 이용한 천연 살충제나 기피제는 게을러서 만들지도 못한다. 그냥 맘 편하게 봄 텃밭 초반에 한 번, 가을 텃밭 초반에 한 번, 일 년에 두 번 정도 저독성 살충제를 뿌려 준다. 벌레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모이지만, 한 번 방제를 해 주면 작물들이 그만큼 해충에 덜 시달리니 자라는 모습도 달라졌다. 겨울을 난 양파를 거두었다. 샬롯 크기나 될까 싶은 알이 작은 녀석들이지만, 파스타 소스나 요리를 할 때 하나씩 가져다가 쓰기엔 부족하지 않다. 알싸하고 알이 단단하고 수분도 가득했다. 그런 녀석들을 퇴근 후 집에 오니 아내가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것도 알이 큰 녀석들로만 골라 말이다. 재주는 내가 넘고, 생색은 아내가 냈다. 양파를 거둔 자리엔 퇴비를 뿌려 땅을 뒤집고 고구마를 심을 생각이다. 우리 밭에서 가장 잘 되는 작물인 고구마를 말이다. 제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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