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많이 따뜻해졌다. 4월 초중순이지만 어느해부터인가 ‘예년보다 빠르다 , 덥다’ 라는 말이 익숙해져서, ‘예년보다 더운’ 주말이었다. 마당에 내리는 햇볕은 화창했고, 공기는 맑았다. 아직 4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건, 오후가 되면서 터지기 시작한 바람에 실린 약간의 쌀쌀함이었다. 나는 집 입구 필로티 주차공간을 비우고, 바로 옆 창고에서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를 꺼냈다. 올해 첫 개시였다. 잠시 의자에 앉아 편한 자세로 마당을 둘러보았다. 반려견 라이 녀석은 내가 뭘 하고 있나, 혹시 간식같은 건 안 주려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온통 녹색이었다. 잘 정돈된 녹색이라면 편안한 이 자세로 좀 더 앉아있겠는데, 그럴 수 없었다. 라이녀석이 다니는 자리의 잔디는 곳곳이 듬성해졌고, 땅 주변의 녹색은 거의가 잡초였다. 조금은 심란한 마음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장갑을 끼고 골갱이를 들었다. 어차피 오늘 해야 할 마당일이 많았다.
제주에서 산 지 10년을 훌쩍 넘기면서, 그간 해 왔던 활동 중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낚시, 책읽기, 글쓰기, 검도, 그리고 마당일.. 베이스 기타는 현재 이 공간으로 이사오면서 중단했고, 건프라 제작은 작년을 기점으로 자연스레 손을 놓게 되었다. 낚시는 마음의 여유만 생기면 농어손맛 정도는 보겠다 하는 마음으로 벼르는 중이다. 자전거 라이딩은 어떻게든 잠깐이라도 이어보려고 마음으로 놓지 않고 있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말하는 이유가 있다. 올해 3월, 나는 개원을 해서 내 병원을 운영하는 원장이 되었다. 그 전에는 봉직의와, 봉직의같은 공동원장직으로 근무했었다. 나름의 시간활용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열만으로도 벅차보이는 그런 취미나 활동들이 가능했다. 개원을 하고나서는 시간적으로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심리적인 압박과 자잘하게 신경써야 할 일들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퇴근 역시 진료를 마치고 나면 해야할 여러 일들로 늦어지는 일이 잦았다. 3월을 여유없이 보내는 와중에 문득 이런 고민들이 솟았다. 올해 텃밭은 운영할 수 있을까? 텃밭을 방치하면 잡초밭이 될텐데, 그건 또 어떻게 관리하나. 내 일상의 어떤 것들을 정리해야 할까.. 사실 지금도 좀 더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이제까지 유지해 온 내 일상이 아까워서, 그리고 소중해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직업적 활동 외에 내가 꾸려왔던 일상들은, 내가 나로 살아가고 지탱해 왔던, 정체성의 의미를 채워가는 방법이었다. 할 수 있는 일들은 이어가야지.. 포기가 쉽지 않은 이유였다. 포기가 쉽지 않기에, 지금도 발버둥치듯 일상을 구성하고 습관화시켜 내면에 정착시키려 노력하는 중이다.
텃밭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겨우내 동면하던 풀씨들이 늦겨울 봄이 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자잘한 싹을 내다가 결국 텃밭 전체를 제 줄기들로 뒤덮었다. 텃밭 주인 보기에는 광대나물이 대부분인 두세 가지 종류의 잡초들이었다. 목적하는 작물이 있는 한, 텃밭을 관리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는 한, 전부 거두어야 할 것들이었다. 나는 텃밭을 나직하게 뒤덮은 녀석들의 줄기덤불을 한 쪽으로 제치고, 골갱이의 날을 흙 안으로 얕게 박은 뒤 긁어내었다. 잡초들의 뿌리가 흙과 함께 덩어리진 채 들려나왔다. 겨울 습기를 머금은 흙과, 그 흙을 거머쥐고 버티는 뿌리와 뿌리털은 무성했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소리없이 원초적이었다. 나는 무심하게 그 몸부림을 골갱이 날로 툭툭 쳐서 흙을 털어냈다. 잔인하다고 해도 좋고 무심하다고 해도 좋을 인간에게는, 잡초의 무성한 몸부림보다는 거기에 뭉쳐있는 흙덩이들이 더 의미있을 뿐이다. 그렇게, 작년에 만들어 둔 이랑과 고랑을 따라 앉은 걸음으로 검질을 매어나갔다. 마당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무르익은 오후의 팝송이 흘러나왔고, 화창한 날의 햇볕은 등과 얼굴에서 땀이 배이게 했다. 겨우내 움직이지 않았던 몸은 잠시의 작업에도 쑤셔했다. 당장에 허리와 골반이 뻐근했고, 좀 쉬려고 몸을 일으키니 현기증이 살짝 생겼다. 몸은 해마다 조금씩 더 힘들어하는 중이었다.
친구들이 놀러왔다. 간만에 보자고 한 몇몇 집이 일도 거들 겸 마당에서 놀기로 했었다. 일도 거들기는 했지만, 주로 마당의 테이블에서 먹고 주말의 여유를 즐겨보리라 함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나도 반가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맞이했다. 반쯤 작업이 끝난 텃밭에 골갱이를 잠시 내려두고, 친구들이 앉을 필로티 공간을 재정리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두릅을 땄다. 텃밭 구석과 뒤뜰의 두릅나무에서는 두릅이 한창이었다. 부엌에서 적당한 냄비와 초고추장을 꺼내고, 마당 한 켠에 가스버너를 켜서 물을 올리고 방금 딴 두릅을 데쳤다. 친구들과 먹는데 향이 좋았다. 뒤뜰의 루꼴라도 순만 골라 거두었다. 3년전 씨를 뿌렸던 루꼴라는 뿌리가 계속 겨울을 나면서 봄이 되면 순을 무성하게 내었다. 고수도 거두었다. 겨울바람을 견딘 고수는 색과 향이 짙었다. 루꼴라는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에 버무려 간을 했고, 고수는 피쉬소스와 고추가루에 살짝 버무려 먹었다. 친구들과 내가 준비한 음식들도 있었지만, 텃밭과 마당에서만 나오는 것들로도 충분한 파티가 되었다. 밥과 쌈장만 있었다면 마당 한 켠의 머위잎도 따서 데쳤을 것이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시원한 맥주를 즐겼다. 4월인데도 시원한 맥주는 잘 어울렸다.
일을 거들겠다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텃밭 검질매기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나는 적당히 배부르고 적당히 알딸딸해졌고 적당히 피곤했다. 마당을 즐기는 친구들도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들이었다. 텃밭에는 겨울을 난 완두가 꽃을 피우고 있었고, 남쪽 구석으로는 넓게 캐모마일이 자라고 있었다. 5월 초 정도가 될 것이다. 완두가 익으면 거두어내고, 캐모마일이 활짝 꽃을 피면 유채꽃 구경하듯 캐모마일 꽃을 감상하다가 거두어 무언가를 심을 자리를 만들 것이다. 머리 속에는 벌써 초봄의 텃밭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순서가 나열되고 있었다. 10년 이상 반복해 온 텃밭은 이제 무심하려 해도 습관이 되었고, 포기하려 해도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해가 길어져서, 배철수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도 마당은 아직 밝았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나는 오늘 생각했던 텃밭 작업을 온전히 마무리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제가 아는 사람들이 가까이서 북적이는 모습을 보고, 간간히 먹을 것을 얻어 먹은 라이 녀석은 만족 반 아쉬움 반의 표정이었다. 아쉬움을 다독이려는지 앞발로 뼈다귀 하나를 세워서 갉아대고 있었다. 캠핑의자들을 접어 창고에 넣고, 캠핑테이블은 물로 씻은 다음 닦아서 말렸다. 쓰레기들을 분리해서 정리하고 어둑해지는 마당을 뒤로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출근이 피곤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요즘들어 강해졌다. 낮에 마신 맥주와 몸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