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텃밭일기 : 0501

by 전영웅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더운 날이 지속되어서, 모종까지 아예 심을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주말에는 살짝 서늘함이 있었다. 예보를 보니 며칠간 서늘할 것이라고 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계획대로, 이번 주말에는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토마토와 오이 호박의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까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흙을 다 뒤집은 텃밭에 들어가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작업이 어렵거나 시간을 오래 들일 이유는 없었다. 천천히 즐기기로 했다. 요즘 날씨는 조금 서늘할지언정 오후의 볕을 즐기기 좋았고, 바람이 조금 버겁긴 하지만 준비를 조금만 하면 힘들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마당의 감나무와 티트리나무 그늘이나, 필로티 주차장에 차를 치우고 캠핑용 의자와 테이블을 펼치고 오후를 즐긴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을 틀어두고, 맥주를 두어 캔 내놓는다. 요즘 날씨나 바람은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맥주가 금방 데워지지 않아 시원함이 오래 유지되어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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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이런 방식이다. 장화를 신고 삽을 들고 텃밭에 들어가 이랑 두 줄을 만든다. 그러면 삽을 꽂아 둔 채 그늘로 들어가 캠핑의자에 앉아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가만히 앉아있는다. 텃밭과 나무그늘을 오가면 마당의 라이녀석은 아빠가 몸 좀 쓰다듬어주려나 싶어 헥헥거리며 나에게 다가온다. 머리와 몸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나는 나의 오후시간을 즐긴다. 토요일 오후는 그렇게 천천히, 텃밭과 그늘을 오가며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다. 귤나무와 앵두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구석진 자리엔 처음으로 비닐 멀칭을 만들었다. 나무그늘 때문에 무얼 심어도 잘 안되는 자리라서,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시도한 작업이었다. 여기에 뭔가를 심게 되겠지.. 아직 뭘 심을 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멀칭자리에서 좀 더 구석진 자리로 딸기덩굴이 낮게 깔리며 딸기를 맺고 있었다.


일요일도 적당히 따뜻하고 화창한 날이었다. 지지대를 만들 계획이었다. 토마토와 호박과 오이를 지지대를 세워 키울 예정이다. 올해엔 얼마나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개원 이후의 시간은 정말 쪼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분주했고, 머리 속도 신경쓸 일들로 어지러웠다. 텃밭에 들일 정성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적고 여유롭게, 종류도 기본을 생각한 최소 수량으로 키울 예정이다. 그러자니, 지지대도 촘촘히 만들 필요가 없었다. 교과서적인 간격 이상으로 최대한 여유롭게 지지대를 꽂았다. 2미터 정도 되는 알루미늄 지지대를 엇갈리게 세우고, 위로 지지대를 올려 고추끈으로 묶어주었다. 고정시킨 지지대에 덩굴들이 타고 올라갈 그물망을 이제 막 설치하려는 찰나, 제주에 일 년 살기를 막 시작한 지인이 집에 방문했다.


지인이 온다는 소식에 나는 오전에 미리 두루치기를 준비해 두었다. 돼지고기를 미리 간을 해 두고, 야채를 미리 손질해 두었다. 우리는 어제의 나무그늘 아래 앉아 테이블 위에 캠핑용 불판을 올리고 두루치기를 만들었다. 돼지고기를 먼저 볶다가 거의 익을 때쯤 야채를 넣는다. 고추장과 고추가루를 넣고 잘 섞은다음, 고기가 완전히 익고 야채의 숨이 죽었을 때, 참기름을 살짝 두른다. 내 특제 두루치기는 오후의 훌륭한 안주가 되어주었고, 우리는 모여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


즐기기 좋은 볕 아래 그늘이라는 환경과 넉넉한 여유 아래 만나는 관계, 우리는 오랜 시간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막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인의 일상을 들었고, 십 년 이상을 제주에서 살아 온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돌아가는 세상 아래 보이지 않는 틀의 존재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관계가 만들어내는 영향들, 그러니까 건네는 말과 행동이 상대의 생각과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변화의 미세함과, 미세함이 인식과 시간으로 축적되어 얼마나 거대하고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일요일 오후의 해는 기울어가고, 두루치기는 바닥을 보이고, 맥주도 적당히 줄고 있었다. 방치된 그물망은 그대로, 점점 세지는 오후의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늘 다니는 자리에 뭔가가 생긴지도 모르고 날아든 참새가 그물망에 잠시 휘청였다. 우리는 불판에 라면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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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그물망을 잡았다. 지지대 간격을 재단해서 자르고 지지대에 고추끈으로 나풀거리지 않게 묶어 고정했다. 상부에 가로로 놓인 지지대에도 군데군데 묶어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도 매듭을 만들어 지지대에 그물망을 잘 고정시켰다. 해가 살짝 어두워졌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다. 계획했던 텃밭 작업은 마쳤다. 나는 캠핑용 의자를 접어 창고에 넣었고, 테이블은 물로 씻은 뒤 옆으로 세워 말렸다. 설거지 할 것들을 집 안으로 올리고, 버릴 것들은 종류를 구분하여 쓰레기 바구니에 담았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는 라이를 데리고 바닷가길로 산책을 다녀왔다. 요즈음의 주말 일과는 보통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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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과 고랑을 만들면서 눈에 밟히는 것은 마당의 잡초들이다. 잡초들도 생의 주기가 있고, 봄은 그들의 번식기다. 좁쌀만한 노란 꽃들이 마당에 깔리더니 이내 조금 위로 좁쌀만한 보라꽃들이 깔렸다. 잔디만 살리는 선택적 제초제 광고가 요즘 많이 들리기도 해서, 제초제의 유혹이 강렬하지만 마당의 라이녀석이 마음에 걸려 진즉에 포기했다. 대신 몸이 직접 제초를 해야 했다. 나는 이랑과 고랑을 다 만들고 나서 골갱이를 들고 쪼그려앉아 잡초들을 거두었다. 꽃이 지고 씨방이 맺히면 그 땐 걷잡을 수 없는 다음 해를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잡초를 거두는 속도는 워낙 느려서, 각오는 필연이 될 수 밖에 없다. 다시 제초제의 유혹이 강렬해지지만, 떨쳐내야 했다. 골갱이를 잡은 내 손이 조금은 더 빨라질 수 밖에.. 쪼그려 앉은 허벅지와 허리가 일어설 때마다 아이고 소리를 절로 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는 좀 더 커지고 잦아지는데, 시골 할망과 할아방들의 어기적 걸음걸이가 어째서인지 몸으로 깨닫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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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과 고랑을 만들면서 완두를 걷어냈다. 잎색이 점점 바래가는 녀석의 꼬투리 하나를 까 봤더니 완두알이 가득 차 있었다. 미련없이 모두 거두어냈는데, 실상은 꼬투리의 반 이상이 쭉정이었다. 농사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서둘러 거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내는 알이 찬 꼬투리를 까서 완두를 거두었다. 거둔 것들은 쌀과 섞어 밥을 했고, 나머지는 그대로 삶았다. 쭉정이라도 완두는 무척 달았고, 하얀 쌀밥 사이의 완두도 밥에 단맛과 감칠맛을 더했다. 농사의 보람과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었다. 텃밭의 캐모마일은 앞으로 한 달은 그 존재감을 한 가득 발산할 것이고, 겨울을 견뎌낸 이탈리안 파슬리는 꽃대를 세우며 다시 한 해를 만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탈리안 파슬리를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요리에 필요한 누군가 가져갔으면 싶은데 나타나는 사람이 없다. 녀석의 운명을 어찌 될 지,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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