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사실적 존재로 소설의 중심에 놓였다. 작가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자체로 순수하고 정제된 악이란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것일까? 악의 기운을 노골적으로 발산하는 존재의 설정에서, 내면에 숨어있는 악이라던지 또는 성악설 같은 보편 본능의 악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읽게 된다. 상대성을 넘어 절대의 악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적 없는 나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아니, 파격이라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다시 둘러보게 되는 작은 두려움이었다 말하는 것이 좀 더 적확하다.
순수한 악이 주변으로 퍼뜨리는 기운의 강렬함을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힘 있게 묘사한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 같았다. 아무런 연관 없을 것 같은 사람들까지도, 깊고 검은 심연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에 힘없이 말려든다. 소용돌이의 줄기줄기에 사람들은 힘없이 휘둘리며, 중심의 검은 악이 쳐놓은 미로 속 또는 거미줄 위와 같은 구조물에서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친다. 그 정교함이 지나쳐서, 사람들의 발버둥은 의미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사실 자신이 덫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현실의 악 역시 그러하던가.. 나는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정결한 악에 휘둘려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악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이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들은 악일까 아니면 보편일까? 정교하게 짜 놓은 구조 안에서 목숨까지 내놓으며 자신을 까발려야 했던 이들을 읽으며 나는 혼란에 빠졌다. 사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이 자리하고 있다는, 아주 당연한 진실이 조금 흔들리는 독서였다. 순수한 악의 존재를 인정한 채, 그 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덫 안에서 버둥거리는 이들이 보이는 그들 내면의 악은 정말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워지는 것이었다. 물에 잠겨가는 아들을 살리려 무의식의 타인이 된 채 수문을 열어버린 현수는 저지대 마을 주민들을 죽이고 터전을 파괴한 악한으로만 다루어져야 할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물이 턱까지 차올라도 정신을 잃지 않고 구조되었지만, 터져야 할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채 아이답지 않은 모습만을 보인 현수의 아들 서원은 가슴 한 켠의 악을 물려받은 악의 잠재자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 역시 생기는 것이다. 이 소설은 순수한 악과 내면에서 길러 올려진 악의 차이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순수한 악을 전제로 분명하게 못 박아 둔 작가의 의도에서, 그리고 이 소설을 읽고 사람마다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성정을 느꼈다는 어느 독자의 후기에서, 악한 마음에 대한 소소하고 세밀한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악일까? 사실 그런 순수한 악이라면, 내면에 도사린 채 어느 순간 드러내는 악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철저하게 정교하고 계획적인 악을,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든 간에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심리는 대체 무얼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악의 화신 오영제의 치밀함을 교도소 안에서 닮아가는 현수와, 현수와 서원 사이에서 치밀해지는 승환과, 모든 것의 결말에서 치밀해지는 서원의 마무리, 그리고 그것을 총체적으로 치밀하게 아우르는 오영제의 시작과 끝.. 다행감을 일으키는 나름의 해피엔딩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거나 비논리적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설정부터, 독서의 시작과 끝에서, 전제와 흐름은 모든 것을 뒤흔들고 고민에 빠지게 한다. 고민은 치밀한 구성을 통해 마음을 활자의 바다 안으로 뛰어들게 하고 긴장과 두근거림을 공유하게 만든다. 소설의 힘, 그것이 작가와 독자의 심리를 동시에 휘두르고 고민하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