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개로 결말에 이를까 하는 궁금증을 키워나갔다. 쉽고 간결한 문장을 바탕으로 꾸준하고 차곡하게 쌓아가던 궁금함은 어느 순간 덜거덕 거리더니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당황스러웠다.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을 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는 작가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모든 걸 급격하게 무너뜨리는 그 당황스러움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될 수 있구나.. 이것은 기교의 승리였다.
치매환자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겪지 못한 타인의 처지나 그들이 속하는 세계를 모른다. 알려고 노력할 수 있으나, 안다 말하는 건 호기롭고 용렬하게 아는 척하는 무례함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의 많은 장치들이나 상황들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치매환자의 세계 안에서 별다른 저항이나 비판 없이 매몰된다. 접촉사고로 만난 남자와의 이후로의 인연과, 시를 쓰고 볼링을 하는 주인공의 일상들이 ‘그는 치매환자다’라는 전제하에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고 만다. 물론 대부분은 소설의 전개와 결말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이지만,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난 뒤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뭘 읽은 거지?’ 하는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치매라는 세계를 우리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하여 전개의 대부분을 결말에서 매장해 버린다. 그 무모함은 급격하게 무너지며 발생하는 당황스러움으로 다시 뒤덮이며, 문제제기의 여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기교로 완성한 소설 안에서 이런 질문이 어울릴지 잘 모르겠다. 한 인간이 지닌 악한 마음이 뇌의 기질적 변화로 초래된 다른 세상 안에서 발현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치매환자가 무의식 속에서 저지른 살인, 그것은 분명 과거의 정상적인 의식 속에서 수없이 저질러 온 살인행위의 연장선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 가능한가.. 과거의 기억은 오롯이 남는다는 특성을 생각하면 무의식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행위는 자수와 같은 고백일 것이다. 몸의 기억만으로 대상을 의식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살인이라는 악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치매환자들은 사뭇 위험할 수 있다. 내면의 오랜 기억 안에 몸이나 가슴에 새겨진 악이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매환자들이 자잘한 불평이나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폭력을 휘두르는 것 말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만한 악한 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단지 소설과 현실의 차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평론가들을 위한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읽어보면 매우 난해하고 내용을 꼬아놓는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당황스러울 정도의 기교가 가득한 소설이 있다. 기교만으로 치장한 소설이라면 그 이야기는 진작 비판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간결한 문장과 툭툭 끊어놓은 듯한 짧은 문단의 연속이 가독성을 높였다. 거기에, 치매 걸린 일흔 노인의 생각이라 하기엔 무리이다 싶을 정도의 철학과 사회적인 지식이 소설의 살을 구성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당황스러울 정도의 전개와 예상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그간의 모든 전개와 사건들을 매몰시키며 반론의 여지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완벽한 기교의 뼈대에, 시대적 욕구에 어울리는 가독성과 풍부한 지식의 살을 적절하게 잘 가져다 붙인 소설이었다. 당황스러움의 여운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그 여운이 새롭고 신선하다는 느낌은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