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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Oct 04. 2017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만지고 싶고, 닿고 싶고,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작년 여름 오래 만났던 연인과 헤어진 후, 난 참 많은 소개팅을 했었다.


갑작스레 텅 비어버린 이 공백을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빨리 메워내고 싶었고, 그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 지금의 이별에 대한 확신을 찾고 싶기도 했었다. 어찌 되었든, 지나간 상처를 새로운 관계로 치유하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역시나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단 나에게는 전 연인의 그림자가 너무 두터웠기에, 누굴 만나도 그와 비교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와 함께였던 시간만큼 재미있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 사실 불과 몇 시간 만나 처음 알게 된 타인을 수년을 함께했던,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전 연인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도 말이 되는 것처럼 해석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수십 개의 소개팅을 했었다. 대부분이 1회성 만남에 그쳤었지만, 단 한 명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올해 초, 바람이 유난히 차던 어느 겨울밤, 어떤 한 남자를 만났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사회생활을 거듭하면서 눈 속의 생기와 힘을 조금씩 잃어가게 되는데, 그는 달랐다. 또렷한 눈동자 속에는 소년의 여린 감성과 순수가 남아있었다.


"나는 사실 어렸을 때는 굉장히 감성적이고 여렸었어. 어떨 땐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흐를 정도로, 근데 그런 감성이 너무 힘들어서 의도적으로 나를 많이 바꾸었어. 성격도 많이 고치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이제는 그래서 쉽게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아. 반대로 기쁠 때도 아주 기쁘지 않고, 항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유난히 감성적이고 나약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치열하게 자기를 탐구했다던 그는, 수년간의 자기 질문과 자기 변형을 통해 지금은 많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강해 보이는 그의 외면보다는, 숨겨둔 내면의 연약한 부분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이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투명한 막으로 꽁꽁 둘러싸고서, 의도적으로 감성을 죽이고 이성만 남겨 살고 있는 것 같다던 그에게 묘한 공감과 동정심을 느꼈다.


하지만 꽁꽁 막아놓은 그의 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아픈 말이지만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는 한 문장, 몇 번의 만남을 거듭하고서 나는 사라져 버렸다. 나 또한 상처가 두려운 연약한 사람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기엔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유난히 차던 겨울도 지나고 새 봄도 지나고 뜨거운 여름이 오고, 계절을 돌고 돌아 다시 그에게 연락이 왔다. 반년 만이었다.





나는 썸이라는 관계에는 추억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의 친밀함도 없었고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관계이니까. 하지만 설렘과 신선한 대화 만으로도 추억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만난 그와의 대화로 알게 되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도, 오랜만에 보니까 또 그렇게 반가웠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그리고 우린 다시 몇 번을 더 만났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조금 더 편해졌고, 조금 더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썸은 얼마 후에 그렇게 다시 또 끝이 났다.


관계는 정말 어렵다. 앞서 썼던 다른 글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쿨한 것은 언제나 덜 좋아하는 자의 몫이다. (더 사랑하는 자 vs. 덜 사랑하는 자, https://brunch.co.kr/@herstory7/15 ) 그러다 보니 더 좋아하는 사람은 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게 된다. 사랑받지 못하는 느낌은 특히나 나를 그렇게 만들고 만다.


사실 상대방이 나를 꼭 좋아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게 또 그렇게 상처가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도 나를 좋아했던 누군가에겐 그런 사람이 되어 상처가 되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헛헛하고 너덜너덜해진 맘의 근원은 무엇일까.



죽도록 사랑한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교감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이 사람도 나의 인연이 아니기에 또다시 누군가를 찾아 헤매야 한다는 공허함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도 나에게 반하지 않은 그에게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그냥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일까. 모든 것이 뒤섞인 감정일 뿐인 걸까.


서로 같은 온도와 같은 타이밍으로 서로에게 반해 함께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일이 이제는 정말 기적 같은 일처럼 느껴진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과거의 뜨거웠던 나의 다른 연애도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지고 싶고, 닿고 싶고,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왜 또 지나고 나서야 절감하게 되는 걸까.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는, 그 아프던 이별 후에도 내가 누군가에게 또다시 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사랑을 할 수나 있을까, 돌덩이 같던 마음에도 설렘이 찾아오고, 호기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쌍방의 설렘과 호기심이 아닌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또 상대방의 자유니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뿐이니까, 지금은 그냥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을 잘 돌봐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언젠가 보석 같은 누군가가 나타나 서로에게 동시에 반짝이는 존재가 되면, 그렇게 시작된 인연에 진정으로 더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정말 보통 인연으로 쉽게 일어나지 않는, 그야말로 기적같은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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