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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Sep 05. 2018

'앙 기모띠'에 담긴 속내를 말한다.

거리에서 어린이들이나 교복 입은 남학생들 옆을 지나치면 한 번쯤 듣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말이 있다. “앙! 기모띠~” 


아이들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초등학교 교사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1위에 오른 ‘앙 기모띠’. 이 희대의 유행어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은 썩 곱지 않다. 포털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면, 세간의 부정적 인식을 재촉하는 기사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붕어빵처럼 별반 다르지 않은 속으로 채워져 있는 기사들은 이 유행어의 유래와 유해성을 지적한다. 즉, ‘앙 기모띠’는 일본 음란 영상물에서 성적 쾌감을 나타내는 일본어 ‘기모찌이이’를 패러디한 말로, 이 지저분한 감탄사를 유행시킨 장본인은 문제의 BJ, 철구라는 것이다.


BJ 철구가 창조해 낸 이 해괴망측한 감탄사는 묘한 중독성으로 특정 세대에서 두루 쓰이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초등학생 사이에서 즐겨 쓰이는 이 단어는 한때 선풍적인 인기였다. 지난 대선 즈음 커뮤니티 게시판의 유저들은 “반! 기문띠”, “안! 철수띠”, “앙! OO띠” 등 유머러스한 변주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한편, 한껏 고조된 기분을 뜻하는 이 감탄사는 성인들만 모인 자리에서 함부로 입밖에 낼 수 없는 터부이다. 사용하면, 속을 터놓는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된다. 어디선가 문득 듣게 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자의 얼굴이 궁금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가 대중 앞에서 잘못 사용하면, 곧장 논란에 휩싸인다. 그래서 ‘앙! 기모띠~’는 현재 널리 유포되어 사용되는 “인정? 어 인정”, “이거 실화냐?”,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보다 경박한 유행어로 받아들여진다. “앙 기모띠”는 유행하지만 사용할 수 없는, 입밖에 내면 경멸적인 눈초리의 대상이 되는 말이다. 과연 ‘앙! 기모띠~’는 나쁜 말일까. 기사의 내용대로 ‘앙 기모띠’는 청소년에게 해악한 유행어인지, 아니면 한 유행어를 지나치게 근엄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는 호들갑인지, 한번 논해보고 싶어졌다.




'기모띠'는 음란물에서 등장하는 표현이다.


기사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79&aid=0003087889


위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포르노에 어원이 있는 ‘앙 기모띠’의 사용을 ‘언어 성폭력’으로 정의한다. 먼 옛날 남자아이들이 치마를 들추는 아이스께끼 놀이로 여학생에게 수치심을 유발했던 것처럼, 뜻을 제대로 모른 채 ‘앙 기모띠’를 유행어로 따라하는 요즘 초등학생 역시 무심코 성폭력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기자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유행어 모방이 짓궂은 장난으로 웃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라 듣는 이의 성적 모멸감을 일으키는 폭력임을 환기시킨다. ‘앙 기모띠’를 비판하는 기사의 전형이다.


BJ 철구가 처음 ‘앙 기모띠’를 사용했을 때, 분명 그는 일본 음란 동영상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방송에서 자주 일본 AV(adult video)의 애호가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앙 기모띠’의 유래를 짚는 기자의 통찰은 일부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말의 근원지가 음란 영상이라고 해서 ‘앙 기모띠’를 입밖에 내면 성범죄자가 되는 걸까. 별다른 언질 없이 일개 유행어를 언어적 성폭력으로 못 박는 것은 나를 사색에 잠기게 했다. 몹시 중요한 지점이다. 포르노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를 본떠 만든 표현은 듣는 사람에게 성적 불쾌감을 유발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혹시 ‘기모띠’를 들을 때 불편함은 익숙하지 않은 표현에 대한 단순 반발심리가 아닐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유행어와 성적 수치심의 상관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앙 기모띠’의 실제 사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형님! 감사합니다!!


인터넷 방송이 기존 공중파 및 케이블 방송과 구별되는 특징 하나는 개인 후원 제도에 있다. 아프리카 TV 플랫폼 한정, 생방송 도중 시청자가 현금으로 환전할 수 있는 아이템 별풍선을 BJ에게 선물하면 BJ는 시청자에게 답례한다. 별풍선의 단가에 따라 차등으로 BJ는 시청자가 원하는 것을 방송에서 제공한다. 크게는 그날 보고 싶은 방송의 컨텐츠, 게임 미션이 될 수 있으며 소소하게는 노래, 댄스, 짧은 리액션 등이 될 수 있다. ’앙 기모띠’는 인터넷 방송에서 BJ와 시청자 간 쌍방향 소통의 한 줄기, 즉 ‘기브 앤 테이크’ 문화와 연관이 깊다.


‘앙 기모띠’는 인터넷 방송계에서 가장 유명한 리액션으로, BJ철구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이다. 시청자가 일정 개수 이상 별풍선을 선물할 경우 철구는 시청자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짧은 쇼를 한다. 애청자가 철구 방송의 시그니처 별풍선 1009개(부가세 포함 약 11만원)를 후원하면, 철구는 우선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이야~ 별풍선 철구(1009)개, 아이고~ OOO 형님!, 나이따~ 나이따~ 감사드려연~”하며, 서서 엉덩이를 뒤로 쭉 뺀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다음 엄지 손가락을 척 내민다. 그리고 외친다. “앙! 기모띠~” 



스타크래프트 도중 현란한 컨트롤로 적의 유닛을 전멸시키고 나서, 배틀 그라운드 플레이에서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뽀록 헤드샷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경우, 감자탕을 먹다가 살코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그는 “기모띠”를 연발한다. 온갖 상황에서 ‘기모띠’는 ‘너무나 좋은 기분’, 오르가즘이 온몸을 휘감을 때와 같은 ‘짜릿한 행복’을 드러내며, 이는 감탄사로서 “아싸!”, 혹은 “나이스!” 등과 유사하거나 보다 강렬한 쾌감의 정도를 포괄한다.




‘꿀벅지’ 논란의 교훈과 '앙 기모띠' 비판에 담긴 속내


‘꿀벅지’라는 용어가 한창 유행했던 2009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성의 신체를 ‘꿀’이라는 끈적거리는 액체에 비유하는 데 불편해했다. 보면 ‘군침이 흐르고’, 신체 부위를 ‘먹고, 만지고, 갖고’ 싶은 저급한 욕망이 ‘꿀’이라는 말속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맞은편 입장에 선 사람들은, ‘꿀벅지’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을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으로 여겼다. 이들에 따르면, 매체에서 ‘꿀벅지’란 단어가 통용되는 데는 이성의 외모를 칭찬하는 문화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뒷받침되어 있다. 마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아이스크림의 성분을 분석하지 않는 것처럼, 꿀벅지를 말하는 사람도 듣는 당사자도 말의 ‘어원’을 따져가며 성희롱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물론 조선 시대였다면 근본 없는 언행으로 여겨졌겠지만,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칭찬을 솔직한 마음씨의 연장선으로 관용한다. 


언어 화용론에 따르면, 말의 의미는 단순히 그 ‘유래’에 의해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관계, 상황과 맥락, 뉘앙스에 따라 변한다. ‘꿀벅지’를 도마 위에 놓고 갑론을박이 오가는 가운데,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인간이 관능적인 이성의 육체에서 섹시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이성의 섹시한 매력 포인트를 칭찬하는 것 또한 인간의 일로서 당연하다. 꿀벅지를 처음 사용한 사람의 의도나 애당초 ‘꿀’의 지저분한 함의는, 실제 발화 상황에서 그 ‘의미’에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앙! 기모띠~’ 역시 마찬가지다. 그 유래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용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서 그 ‘유래’는 크게 의식되지 않는다. 


듣기 불편한 모든 말이 성희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앙 기모띠’는 그 어감 때문에 지저분하게 들린다. 일상에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외래어의 이질감은 듣는 이를 당황시킨다. 앞에 하나 덧붙은 ‘앙!’의 어감은 귀여운 듯하면서도 오글거린다. 하지만 ‘앙 기모띠’는 성희롱과 거리가 있다. 혼자 자기 기분에 취해 여기저기서 ‘기모띠’거리는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의도를 갖고 특정인을 청자로 정하지 않는다. 신나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흥얼거림에 불과한 ’앙 기모띠’는 행위를 수반하는 ‘아이스께끼’ 놀이와 발화의 전개 양상이 다르다. 그래서 ‘앙 기모띠’를 들을 때 불쾌함은 성적인 수치심과 모멸감이라기보다, 미지와 조우할 때의 낯섦과 유사한 종류이다. ‘앙 기모띠’는 우리의 정신을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예쁜 말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앙 기모띠’를 사용하라고 권장하지 않는다. 그럼 ‘앙! 기모띠’는 언어적 성폭력인가? 이 주장에는 더욱 동의할 수 없다.


단순 코미디에 엄격/근엄/진지하게 인상 찌푸리고 훈계를 통해 분위기를 초상집으로 만드는 것은 전통이 오래된 대한민국 고유의 문화이다. 유머를 한바탕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꼭 한소리 하려는 강박관념은 우리의 각박하고 삭막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게 한다. ‘앙 기모띠’가 논란이 된 것은, 일종의 관용의 부재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세대의 언어를 한 번쯤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관용의 부재. 즉 ‘앙 기모띠’ 논란을 촉발시킨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치환해버리는 꼰대적 감수성이다. 


속이 꼬여있는 일부 꼰대의 민낯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언어를 일단 부정한다. 부정할 적당한 이유를 찾아 헤매다 실상과 전혀 무관한 ‘성희롱’ 논리를 아전인수격으로 동원해 대중을 선동하며, 선동한 여론을 통해 일단 입을 틀어막고 본다. 창의성의 단초가 되는 표현의 다양성과 자유를 존중하기보다, 절대적 권위 의식으로 궤에서 어긋나는 언행을 지적해 기성의 틀에 맞게 재편하려는 유사 지식인 층의 속셈이 ‘앙 기모띠’ 비판에 깔린 저의이다. 타인을 구속하고 억압해야 직성이 풀리는, 비이성적 오지랖과 비틀어진 의무감에서 비롯된 훈장질의 실상은 사실 꼬장 부림이다. ‘앙 기모띠’에 담긴 속내? 사실 별 게 없다. 하지만 ‘앙 기모띠’의 비판에는 이렇듯 구린내 나는 꼬장이 웅크리고 있다.



응 아니야


일본에서 “기모찌이이(きもちいい)”는 일상의 평범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육감적인 쾌감을 뜻하는 단어 “기모찌이이”는 화창한 날씨에 산들바람이 얼굴을 살랑이거나, 샤워 중 온수가 피로를 풀어주어 몸을 노곤하게 할 때 별달리 의식하지 않고 쓴다. 일본 프로야구 선수 지지 사토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어미를 길게 발음하며 ‘기모찌’를 대중에 유행시켰다. 일본 내에서도 널리 사용되지만, 일부 한국 기자들만 “기모찌이이”를 음란물에만 등장하는 표현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단어의 뜻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하는 모양새가 된다. 만약 일본 언론이 우리말의 “살살”이라는 부사를 에로 영화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도한다면, 기사를 읽는 우리 또한 실소를 흘리지 않을까.


’앙! 기모띠’는 왜 ‘꿀벅지’처럼 옹호받지 못했을까. 특정 세대 사이에서만 주로 애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만든 사람이 비겁하고, 무례하고, 찌질한 전대미문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철구이기 때문이다. ‘앙 기모띠’를 비판하면서 청소년의 언어생활에 해악을 끼치는 인터넷 방송을 규탄하는 사람들에 대한 철구와 시청자들의 반응은 흥미롭다. 마치 듣지 못했다는 듯, 그들은 이 비판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취급한다. 생활 현실과 괴리된 유사 지식인의 논리적 비약은 씨름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구는 여전히 방송마다 수십 번씩 기모띠, 기모띠거리고, 학생들도 여전히 기모띠를 따라한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뭐? ‘앙 기모띠’가 성희롱? 응 아니야. 기모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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