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광장>을 읽고서
볕 좋은 주말 오후 광장에 나갔다. 오돌토돌한 광장 바닥에 빛이 잔뜩 부서지는 통에 부신 눈을 부여 잡은 나는 곧 적당한 보금자리를 물색해야 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곳은 양지 바른 곳이 훤히 내다보이는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 밑. 나무 밑 서늘한 그림자 드리운 것이 퍽 흡족하게 마음에 차오른 곳이다. 이내 태연히 광장의 광경을 내다보았다. 한 아이는 풍선을 놓친 것이 못내 서러웠는지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고, 지나가던 한 할아버지는 울음소리가 거슬려 혀를 차며 아이를 꾸짖는다. 멀찌감치 길다란 벤치에 누워 한 몸처럼 몸을 합한 젊은 커플은 아이와 할아버지와는 다른 공간, 다른 세계 사람인 듯 안면에 이질적인 행복을 드러내고 있었고, 또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어느 아주머니는 받아주는 손길 하나 없이 공허한 손놀림에 괘념치도 않는듯 초연해 보였다. 나는 '눈부시도록 어두운' 저 광장의 적나라함에 민망함이 솟구친다. 마주침은 있지만 만남은 없는 광장. 말소리는 있지만 대화는 없는, 아니 대화는 있지만 소통은 없는 이 광장에 나 또한 민망히 홀로 존재할 뿐이다. 독방에 틀어박힌 채 눈을 감고, 귀를 닫는 밀실들의 허우적거림은 외연만 그럴싸한 고독을 하릴없이 양산할 따름이었고, 누구의 삶도 조망하지 못하는 눈은 과학으로만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눈에 지나지 않았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느낀 허무함은 이런 것이었을까. 평생에 걸쳐 소망했던 자유를 끝내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찾지 못한 절망, 갈구했던 '광장'은 결국 죽음의 소용돌이에서나마 짧은 조우를 뒤로한 채 인생을 마감한 그 허무함 말이다. 아래는 저자 최인훈이 <광장>의 서론에 적은 글 일부다.
<광장> 서론 중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그렇다. 광장만 널찍이 조성한다고 건강한 국가가 되는 것도, 밀실의 향유만 깊다고 건강한 개인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토론하기 위해, 성찰하자. 노동하기 위해, 휴식하자. 광장에 나가기 위해, 밀실을 가꾸자.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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