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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자, 내면에 침잠한 앙금

<아이오닉 롱기스트> 마라톤을 다녀와서..

by 혜윰

한국에 뚜렷한 매니아층을 확보한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익히 알려진 마라톤 애호가다. 그에 따르면 마라톤은 왜 하는지 모르면서도 빠져드는 기이한 경험이라고 한다. 덧붙여, 뭐에 씌인듯 대회를 신청해서 발을 구르다 보면, 이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고는 '도대체 이 지독한 일을 내가 왜하고 있는거지? 다시는 하지 않을거야' 따위의 것들 뿐이라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승선을 지나 숨을 거칠게 헐떡이다보면 저도 모르게 이번 대회에서의 아쉬웠던 점을 되짚어보며 다음 대회에 대한 의욕을 다지고 있다는 것이다. 왤까. 마조히즘적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니고서는, 뭣하러 스스로를 궁지에 내몰아 극기의 경험을 하는 걸까. 고작 10km를 뛰어놓고 하루키에게 공감하려는 것이 어불성설일 지언정, 뛰는 내내 하루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평소 우리는 '나'라는 유기체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분주한 조직 및 기관들의 역동을 의식하며 살아가진 않는다. 그것은 지탄 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자, 당위의 영역이다. 그렇지 않고선 더 복잡한 사고를 요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집중이 흐트러질 것이며, 도리어 조직 및 기관의 역동이 목표하는 바와는 달리 유기체의 죽음이 초래되는 불상사가 따를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뛰는 내내 그간 조망하지 못한 내 몸에 대해 단순한 반성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나를 지탱하던 그들의 역동 말이다. 무거운 몸뚱이에 대한 처절한 인식 말이다. 더 단련하지 못한 근육의 부대낌 말이이다. 금방이라도 힘을 잃고 쓰러질 것 같은 정신력 말이다. 비로소 죽을 것 같이 힘들 때에서야 살아 있음을 느끼는 역설이라니. 익숙한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진부한 클리쉐를 다시금 깨닫고 끄적이는 유치함이라니.



정치계에서 이래저래 상처 받고 자리를 물러난 안철수 씨가 간간히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소식을 매체로 접했다. 내면을 쿡 찌르는 복잡한 번민들을 가라 앉히기 위해선 육체를 힘들게 하는 방식이 여러 사람에게 잘 들어 맞나보다. 학업 걱정, 취업 걱정, 기타 개인적인 문제 등으로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군시절의 단순 노동이 그리운 것도, 어쩌면 힘껏 몸써 땀 흘리는 솔직한 노동 뒤에 찾아오는 단순한 '쾌청'의 상태가 그리운 것이 아닐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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