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작가에게 주는 위안
2018년, 아직 학생이던 여름 어느 날. 서울 동교동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한참 거리미술전 작품 회의를 끝내고 밖을 나왔다. 방금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던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무섭게 땀이 삐질삐질 났다. 살인적인 햇빛.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횡단보도로 가려고 고개를 살짝 들다가 깜짝 놀랐다. 저 건너편에, 찌는 더위만큼 답답한 건물들 사이로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개의 색깔이 걸려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파란 불을 기다리는 게 마치 그 무지개와 마주 보고 서 있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울로 잴 수 있을 것 같이 무거웠던 마음을 그 무지개가 가볍게 날려버렸다. 이건 가끔 가다, 정말 가끔 가다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무지개의 특별함이 가진 능력이었다.
파란불을 기다리며 그때의 난 생각했다. 약속의 증표라고 말해지곤 하는 무지개를. 내린 비 때문에 두려웠니? 난 널 지킬 거란다. 그 다정한 약속을.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겨우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들보다 느린 발걸음으로 한 손에 꼽힐 만큼 몇 개 되지도 않는 작품을 끝내고 나서, 아직 흐름이랄 것도 없이 고작 발자국 몇 개 찍어놓고 내 안에서 꺼낼 것이 모두 사라지면 어떡하지? 혹시나 벌써 정체된다면 어떡하나? 시작과 동시에 끝을 생각했다. 오지 않은(을) 날들을 끌어다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나였다.
걱정은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오는지.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고 완성하는 그 과정 사이사이 실체 없는 불안이 계속 공격을 했다. 모든 것이 나와의 싸움. 혼자 작업하는 사람의 숙명이겠거니 하면서도, 작품 하는 것만큼 이렇게나 내 안의 확신을 요하는 일도 없겠다 싶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지우듯 세수를 하다가 문득 몇 년 전 그날의 무지개가 떠올랐다. 떠올림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무지개. 나의 무지개. 삶은 살아있어서 맑을 때도 있다가 구름도 끼고 비도 내리며 요동치는데, 소망이란 건 그렇게 요동할 때마다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힘을 주는가 보다.
다시, 힘을 내보자. 마음을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