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전형에는 붙을 줄 알았는데

: 경단녀

by 윌버와 샬롯

서류전형 통과할 줄 알았다.


어제가 서류전형 발표날이었는데 그에 대한 문자가 내게는 오지 않았다. 합격이면 개별 연락이 왔을 텐데, 혹시나 하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결과는 역시나 발표됐고, 그 안에 내 이름은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에도 비슷한 계열의 전형에 면접까지 갔기에 이번에도 거기까지는 갈 줄 알았다. 서류를 보내고 지난번의 고배를 되새기며 이번에는 면접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머리에서는 그 생각만 맴돌았었다. 근데 서류도 통과를 못했으니 난 이쪽에서 가망이 없는 걸까.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취업이었다. 때때로 관심 있는 일이 눈에 띄면 심혈을 기울여 지원했었다. 이번 달에만도 두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하나는 4시간짜리 아르바이트였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주말 근무 조건이 있는 일에는 엄두도 못 냈지만 이번 곳은 시간도 길지 않고 아이를 돌보면서도 일상생활에 크게 벗어날 만큼은 아니며 경험과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넣어봤다. 4시간 파트타임 일임에도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까 싶을 정도로 작성해서 냈다. 그런데 연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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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이 너무 길다. 이제 하고 싶은 일에 난 경력도 없다. 이전에 했던 일은 손을 놓은 지 오래라 그것도 이제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 나이에 거의 신입이나 다름없는 나를 누가 뽑기나 할까. 한 살 더 먹는 내년이면 더 힘들 거 같은데, 음만 급해진다.


작년부터 줄기차게 취업에 도했다. 서류 통과도 안되다가 언제부터는 면접도 보게 됐다. 사람 마음이 참 그렇다. 서류만 냈는데도 이미 그 회사에 합격한 것처럼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다음 단계는 설레발이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 여태 하나하나 챙기던 아이들은 어쩔지, 방학 동안 아이들 밥은 또 어떡할지 닥치지도 않은 근심을 하고 있다. 면접을 보고 와서는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 혹여 면접에 말을 좀 잘하고 왔다고 생각이 드는 날에는 이미 합격한 마음마저 들었다.


최고보다는 최적의 인력을 채용하느라 부득이하게 이번에 저희와 함께하지 못함에 아쉽고 죄송한 말씀드립니다. 선생님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어느 날 받은 탈락 통보에 대한 완곡한 문자 메시지다. 한참을 바라봤다. 멍해졌다. 참으로 정중했지만 실망의 강도는 다르지 않았다.


무궁한 발전은 그곳에서 하고 싶었는데. 자신 있었는데. 그중 내가 제일 말을 잘하지 않았던가. 그게 잘못이었을까. 너무 자신만만해 보였던 걸까. 정말 문자처럼 난 최고지만 최적이 아니었던 걸까.


내가 경영자라면 나 같은 조건의 사람을 뽑을지 냉철히 생각해 보기도 했다. 상관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그것도 힘든 문제임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난 나이 경력 불문이라는 곳에만 지원했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맥일 뿐일까.


면접관이 아닌 이상 모를 일이다. 아이를 가지고부터는 사회 경험이 없으니 난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그냥 아줌마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책 제목의 '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야'가 아니라 생각보다 난 별거 아닌 사람이었던 걸까.


내가 뭐가 문제이고 부족한지 그들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모자란 게 있으면 배우면 되는 거지만 나이가 문제면 아예 이제는 이 상처 받는 도전을 멈추고 싶기도 하다.


회사 다닐 때 일이다. 동료가 퇴사를 하면 정직원이 아닌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로 회사 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 직장 선배가 그들을 두고 한 말이 억난다.


회사를 나가면
아무래도 감이 떨어지더라고


어차피 하는 일은 그들과 다르지 않은데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회사에 있다 해서 그렇게 정보에 밝았다거나 자기 계발에 우리가 열심이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 예전 사부에게 듣던 말이 여전히 내 맘 속에 박혀 있는 건 아마 나 자신도 후에는 바로 그렇게 트렌드를 놓치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드라마 VIP
"그깟 회사 그만두면 되지."

"쉽게 말하지 마.
어떨 때는 이렇게까지 버텨야 하나 싶고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이거마저 놔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아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야.
이거 버틴다고 뭐 되는 거 아닌 거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을 모르겠어.
내가 이십 대 내내 노력해서 얻은 게 이것뿐인데 어떻게 해.
간신히 들어온 회사에서 살아남으려고 죽을힘을 다했어.
여기서 그만두면 이 악물고 버틴 그 순간이 한순간에 사라지겠지.
그렇게 되면 나도 같이 사라질까 봐 무서웠어.
애들 엄마로 사는 거 너무 소중한데 나는 송미나라는 사람으로도 살고 싶어.
그런 내가 이기적인 거야?"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대사 중 하나다. 이 드라마 전체 중에 가장 공감되는 말이 아니었나 싶다. 그 대사에서 나의, 아니 82년생 김지영이, 더 나아가 그 이외의 모든 여성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들려왔다.


세 남자아이를 키우는 드라마 속 워킹맘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커리어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된다. 그게 가능했던 건 이내 부인을 이해하고 육아를 유쾌하게 분담할 줄 아는 다정한 남편의 존재였다. 다른 하나의 희생으로 그녀는 다른 등장인물보다는 나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된다. 그녀가 만년 사원에서 이제부터라도 능력에 맞게 대리도 되고 과장도 되는 그런 앞날을 비록 드라마지만 응원하고 싶었다. 그것이 남의 얘기처럼 보이지 않은 게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모든 엄마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탈락 이후 그 후유증은 꽤 오래간다. 기대한 만큼이나 그 실망도 예상보다 컸던 것 같다. 고심하여 썼고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써낸 자기소개서가 갑자기 민망해지기도 한다. 한동안은 한없이 내가 작아져 있게 된다.


올해가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위시리스트였던 취업이라는 소망을 난 이룰 수 있을까. 아니 난 다시 지원서를 낼 용기가 과연 생기기나 할까.


대책 없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 언젠가는 내게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이런 것들이 괜스레 쓸데없는 일처럼 생각도 든다. 새해에도 이 꿈을 꿔야 할까. 치사하고 더러워서 그냥 내가 차리고 말지 하는 온갖 잡생각으로 정신이 어지럽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서든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마음을 열고 꾸준하게 일하는 날들을 보내는 것,
유익한 삶의 질서를 갖는 것이다.

- 토마스 만(Thomas Mann) -


꿈을 이룬 어느 작가의 강연에서 인용하는 이 글을 만났다. 작가는 멈춰지지 않는 열정으로 결국 이뤄낸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다 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굳건히 말하는 그녀가 참 단단하게 보였다. 그리고 부러웠다.


그러니까 나도 포기하지 않으련다.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멈추기에는 여전히 내 가슴은 뜨겁다. 여태 나를 거절했던 그곳들은 내 자리가 아니었을 뿐이다.


마음을 열고 꾸준하게 일하는 날들을 보내며 유익한 삶의 질서를 갖는 것, 내가 원한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새해니까 다시 준비하고 움직여보자.


난 여전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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