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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미워질 때 꺼내봐야 할 책

: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by 윌버와 샬롯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책 제목을 보고선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가 엉뚱하게도 떠올랐다. 단풍잎을 맞으며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뒷짐을 진 닮은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아이라는 존재를 표시하기 위한 색깔로 언제부터 노란색이 그 시그니처 색이 되었을까. 삐약삐약 병아리 색이라 그런 걸까? 환하게 가장 눈에 잘 띄는 색깔이어서 그런 걸까? 아이가 타는 어린이집 차량부터 학원 셔틀버스 그리고 학교 근처 건널목에 있는 옐로카펫까지 죄다 노랑으로 점철된다. 이 그림책의 표지를 아우르고 있는 노란색은 아이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 함께 어렸었던 엄마를 떠올리게 한다.


엄마는 지금 너를 기다리고 있어


엄마는 아이와 처음으로 떨어져 자는 날을 맞았나 보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캠프를 갔다. 그런 아이를 기다리며 엄마는 예전 생각이 난다. 단순히 당일치기 소풍을 간 것이 아닌 부모와 떨어져 하룻밤을 자고 온다는 것은 아이에게도 그렇겠지만 엄마에게도 대단히 긴장되는 큰 일이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아이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많기도 해서 더욱 그렇기도 하다. 어디를 보내든 맘 편히 아이를 보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책을 찬찬히 보다 보니 기억들이 새록새록 난다. 그림 하나하나에 내 추억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아이를 키운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여럿 보일 것이다. 아이 성장에 맞춰 변해가는 집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맞아 맞아 우리도 그랬지'하며 격하게 공감할 것이다.


네가 아기였을 때, 엄마는 잠든 네 곁을 쉽게 떠나지를 못했어


아이가 영아일 때는 재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 예민했던 아이는 꼭 30분 이상 안고 있어야 잠이 들었다. 겨우 잠이 든 것 같아 바닥에 누울라치면 깜짝 놀라며 다시 깨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국민 바운서라고 불리던 의자를 만나고부터는 왜 이 의자가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동감하게 됐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거기에서 잠시라도 아이가 새근새근 잠이 드는 기적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재웠다 해도 혹여 오래 자고 있으면 아이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숨은 제대로 쉬는지 아이 코에 손가락을 대본 적도 많았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던 엄마는 모든 신경이 아이에게 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문 옆에 꼭 있던 아이용 변기도 기억난다. 기저귀를 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시절, 아기 변기에 앉아 쉬를 하던 그런 때도 분명 지금 우리 아이에게도 있었다. 딸은 분홍색, 아들은 파란색으로 각각 구별해서 쓰라고 두 개를 놓았었는데, 필요 없어진 후에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때 썼던 아이의 여러 용품, 벽에 그려진 아이 낙서. 이제는 사라졌지만 그것으로 인해 아이가 자라났다. 아이를 낳고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는 언제나 기적을 경험한다. 그 모든 것이 아이에게도 처음이고 엄마에게도 모든 것이 최초였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전히 기억나는 순간들. 최초의 뒤집기, 최초의 걸음마, 최초의 젖니, 처음 엄마라고 부른 날, 최초로 두 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날. 그 모든 날이 세상의 전부였고 우주였다.


네가 좋아했던 까꿍놀이 기억나니?


아이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간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교실 앞까지 따라 들어가 선생님에게 아이를 맡긴다. 선생님 손에 이끌려 교실에 들어갔지만 아이는 여전히 엄마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두고 집으로 혼자 걸어오는 그 길이 너무나 무겁고 힘들었다. 분리불안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잊고 있던 육아 초보 엄마의 기억이 새록새록 소환되는 와중에 그중 으뜸은 두 장면이었다. 화장실에 가있는 엄마를 꼭 찾던 아이, 엄마는 용변 보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아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조용히 밖으로 나가 부리나케 쓰레기를 조마조마 버리고 오던 엄마, 혹시라도 그 사이에 아이가 깰까 그 짧은 시간마저 전전긍긍했었다. 끼니를 어찌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있었을까. 아이가 자는 틈에 식탁에 앉지도 못하고 대충 서서 때웠던 엄마. 모두가 그렇게 아이를 키웠을 것이다.


얼마 전 클라우드 접속 기한이 오래되어 소멸될 거라는 메일을 받았다. 오래간만에 들어가 본 그곳에는 어린 시절 아이들 사진이 빼꼭하게 있었다. 불과 3~4년 전 사진임에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 남편과 그 사진을 보며 얘기한다.


아, 이런 때가 있었네.
이때 애들 정말 예쁘지 않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아름다운 것은 왜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걸까. 예뻤던 아이, 이렇게도 환하게 웃던 아이, 그 천사가 여전히 내 옆에 있다. 분명 앞으로 3~4년 후에도 현재의 아이 사진을 보며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겠지. '그때가 좋았어'라고. 아마도 항상 그렇게 과거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앞으로 더욱 엄마 품을 떠날 일이 많을 것이다. 아이는 처음 이별은 힘들어했겠지만 자라면서 곧 무뎌질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엄마는 아이처럼 담대해질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키가 엄마보다 훌쩍 클지라도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엄마는 마음 졸이며 아이를 기다릴 것 같다.


사랑하는 아이야,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렴.
날다가 힘들어 쉬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오렴.
엄마가 꼭 안아 줄게.


한때 아이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 그러나 이제 성장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는 짝사랑의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그건 아마도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이며 숙명일지 모른다. 자라는 아이를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되리라. 우리는 잠시 아이 옆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일 뿐이다.


사랑하지만 아이가 미워질 때가 있다. 엄마 말이면 하늘같이 여기던 아이는 이제 사라졌다. 그렇다. 당연한 거다. 아이는 자라고 있으니까.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다. 그때마다 이 책을 들여다보자. 그러면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 아, 이런 때도 있었지.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시절이 있었지. 참 다행이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가 건강히 내 옆에 있으니.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독일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를 집을 수 있는 나이 때부터 색연필은 아이에게 친숙한 도구다. 그런 색연필로 칠해진 이 그림책은 마치 아이가 그린 것처럼 너무나 익숙하고 소탈하다. 이제 아이는 색연필보다는 샤프펜을 더 좋아하는 나이가 됐다. 그다음에는 또 뭐를 좋아하게 될까. 그런 과정을 지켜보며 오늘도 엄마는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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