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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엄마가 될 줄 알았는데

: 삐약이 엄마

by 윌버와 샬롯

단언컨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어떤 대단한 것을 이룬 자라 하더라도 아이를 키우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람은 그래도 진짜 인생은 모르는 거군'하는 빈정거리는 못난 속내가 내겐 있기도 하다. 부러움 섞인 질투의 발로일지도 모르겠지만.


"회사 가서 일할래? 아이 볼래?" 둘 중에 선택하라면 일하겠다고 답하는 워킹맘을 주변에서 여럿 보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엄마들을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사람으로 피로감이 잔뜩 묻어난 자조 섞인 개인적 의견일 뿐이다. 모성애가 지극히 없어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단지 엄마이기 이전에 나약한 한 인간이기에 그렇다.


책으로도 익히 읽었던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추석 연휴에 TV에서 하는 걸 뒤늦게 봤다. 지인을 통해 들은 영화평은 개봉 당시 언론에서 갑론을박하던 평과 비슷하게 듣기도 했다. 줄거리도 영화도 뻔히 대충 알면서 시청한 거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난 책을 읽었을 때처럼 또다시 답답하고 분개하며 눈물을 흘렸다.


페미니즘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논리를 들먹이기에는 식상한 주제가 아니던가. 아직까지 여자 일 남자 일 구별 짓는 촌스런 세상은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현실에 슬펐다. 육아에 헌신했지만 나이만 든 것 같고 제대로 이룬 게 없는 것 같은 허망함을 종종 느끼는 나 자신이 영화로 다시 투영되 보였다. 내 딸에게는 절대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마저 되새겼다.



아이를 갖고 싶었다. 난 당연히 좋은 엄마가 될 줄 알았다. 나한테 오는 아이는 복 받은 거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로서 모든 것이 준비된 사람이라 여겼다. 최고의 엄마가 될 줄 자부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엄마라는 자질은 천성적으로 부여받는 것이 아님을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사랑은 받은 만큼 줄 수 있는 것이다. 내게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절대적 양이 부족한 것 같다. 노력은 하지만 난 많이 서툰 엄마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 때는 엉뚱하게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원망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연민으로 가득한 엄마에 대한 감정이 못난 내 행동이 보일 때는 자꾸 엄마 탓으로 돌린다. 받은 것이 없으니 아이한테도 이렇게 사랑을 주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방법을 모르니 수많은 육아서와 상담 사례를 기웃거려 보았지만 그때뿐이다. 몸에 뿌리 깊게 체화되지 않은 이론들을 아이에게 꾸준히 적용하기가 난 여전히 어렵다. 주변 사람들은 당신처럼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어디 있냐며 말은 하지만 스스로는 항상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아이의 모든 문제가 모두 내 잘못 같아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여러 날이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모성애는 천성인 걸까? 학습이 가능한 걸까? 나는 엄마 자격이 있는 사람인 건가?


주변에 아이와 관계가 좋고 친구처럼 잘 지내는 부모를 보노라면 남의 세상처럼 부럽기만 하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그런 부모들은 그의 부모에게서도 그런 사랑을 똑같이 받고 자란 사람이다.


그렇게도 원했던 일이었지만 내가 주체이면서도 따스하고 평범한 부모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는 것이 힘들다. 이러려고 아이를 힘겹게 낳은 게 아닌데, 난 행복하기 위해서 아이를 가진 건데.


'니양이'라는 악명 높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 니양이는 닭장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여기 심술 맞은 고양이 니양이가 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일상인 녀석이다. 암탉이 기함하며 보는 앞에서도 따뜻한 달걀을 간식으로 꿀꺽해버리는 못된 고양이다.


애통한 암탉의 저주였을까. 절절한 어미 맘이라도 알라고 신이 내린 장난인 걸까. 어느 날 니양이는 여느 때처럼 홀로 있는 달걀을 슬쩍 한 입에 먹어 버린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가뜩이나 뚱뚱한 니양이의 배가 점점 더 부풀어 올랐습니다.
"내가 병아리를 낳았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데, 고양이 뱃속에서 병아리가 부화했다. 병아리를 낳은 고양이라니!


어미라고 철석같이 믿은 병아리는 니양이에게 다가간다. 작고 보드라운 여리디 여린 것이 니양이 품에 안겼다. 어느 누가 그 순간을 다하겠는가. 하물며 내 속에서 나온 존재인데. 니양이는 순간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 작은 것을 안전하게 키우고 보호하기 위해 니양이는 생각지도 않은 일상으로 들어온다. 마치 엄마가 되기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은 육아라는 신세계에 입문했던 여느 부모들처럼 말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산후조리원'이 생각난다. 전 회차를 꼼꼼히 보지는 못했지만 살짝 본 에피소드에서마저 난 이 드라마가 극사실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출산과 육아 초기의 A에서 Z까지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라마는 보여줬다. 환상이 아닌 현실 그대로 여자에서 처절한 엄마라는 세계를 그대로 조명했다. 경험하지 않은 자는 절대 모를 세계이지만 경험한 자는 폭풍 공감하며 몇 날 며칠을 얘기해도 화수분처럼 절대 줄어들지 않는 신기한 세상, 그게 바로 출산과 육아다. 극한까지 갈 수도 있는 그런 일이기에 여자는 '아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끈끈한 연대가 가능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는 워킹맘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휴직을 결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성애만 앞세우는 그런 뻔한 결말이라니, '드라마가 끝에 가서 버렸구먼'하며 난 실망감에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작가는 깨어있었는지 그런 클리로 드라마를 마무리 짓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괴롭히기만 일삼던 암탉들 옆에서 얌전히 있는 니양이 마지막 모습이 남다르다. 세상 무서울 것 없었지만 아이 앞에서라면 다른 엄마들 틈에서 조용히 옥이야 금이야 내 아이만 지켜보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책 면지의 처음과 끝도 의미가 있다. 처음에는 니양이 발자국만 보이지만 마지막에서는 병아리 발자국과 나란히 찍혀 있다. 혼자가 아니어서, 지킬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서 니양이는 행복한 걸까.


'마당을 나온 암탉'도 생각난다. 결국 자신과 다른 엄마를 떠나 훨훨 하늘을 날아가는 초록이가 떠오른다. 여기 니양이의 미래는 어떨까. 닭이 될 병아리와 오래도록 함께 한다는 건 욕심인 걸까. 니양이가 세상의 전부라고 현재는 믿고 있을 병아리와 함께 지붕 위에서 달을 바라보는 평화로운 일상은 언제까지 가능할까.



참 자신 있었는데, 사랑을 주는 건 책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쩌면 어린 시절 너무 외로웠던 나를 위해 아이를 낳고 싶었는지 모른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 나를 위해 보상받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서 경험이 부족하다고 모두가 나약한 엄마가 될 거라고 치부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그 너머를 넘을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믿는다. 계속 절망하지만 난 다시 일어나서 배우고 용기를 내고 연대하며 방법을 찾는다.


나의 엄마는 애달프게도 나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혼자서도 가능하게 하는 힘을 물려주셨다. 어떤 것이 더 소중한지,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할지 스스로 깨닫게 해 주셨다. 난 가끔 슬플 때 엄마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또다시 엄마를 그리워하고 기억하려 애쓴다. 그 모든 것이 엄마가 내게 준 유산이다.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퇴소하는 아기 엄마에게 원장이 하는 대사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좋은 엄마란, 완벽한 엄마가 아니에요.
아이와 함께 행복한 엄마지.


삐약이 엄마가 된 여기 니양이도 삐약이랑 행복할 것이다. 완벽한 엄마는 아닐지라도, 가끔은 상처도 받겠지만 생각지도 않은 일상으로 뛰어든 것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는 이제 학교에서 돌아올 것이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차려주는 간식을 묵묵히 먹을 것이다. 자기 방문은 언제나 꾹 닫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잠그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는 크고 있다. 엄마도 같이 자라고 있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어제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적어도 돌아가신 엄마보다는 난 성공한 엄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언제나 아이 옆에 있어줬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다. 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 난 아이들 옆에 꼭 있어 줄 거다. 그게 내가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는 아이에게 할 도리이다.


서툰 엄마지만 그래도 아이가 훗날 알았으면 좋겠다. 방법이 틀렸더라도 엄마는 너를 사랑했고, 그래도 노력하는 엄마였다고.


'오늘 간식은 뭘 해줄까'하며 엄마는 다시 고민하며 그렇게 항상 아이를 짝사랑한다. 그러면서 또 엄마의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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