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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으로 나가길 주저하는 그대에게

: 나의 작은 인형 상자

by 윌버와 샬롯
난 밖으로 나갈래.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소녀는 밖으로 나간다며 구두를 신는다. 그리고 같이 가자고 누구에게 얘기한다. 소녀는 어디를 가려는 걸까?


인형의 집이 있다. 문까지 꼭 닫을 수 있는 완벽한 집. 그 안을 들여다볼까. 침대 옆 칸에는 화장대가 있고 그 아래 계단을 내려오면 냉장고가 있다. 또 그 옆에는 소파가 보인다. 이 공간의 주인이 깨어난다. 인형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에도 앉아보고 아래로 내려가 냉장고에서 케이크도 꺼내 먹는다. 그러고 나서 소파에 앉는다.


인형이 집을 한 바퀴 돌자 인형의 진짜 주인이 등장한다.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녀에게 친구들이 뭐하냐며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인형의 집을 닫는다. 부끄러워져 인형의 집을 감추고 마는 아이는 속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마음을 꼭 닫은 아이처럼 보인다.


어느 날, 인형은 잠에서 깨어났어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걸어 갔어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어느 유행가 노랫말이 떠올랐다. 인형의 집 여러 공간을 이동하며 보이는 인형 모습은 소녀 본연의 내면이기도 하다.


이제는 포근하고 아늑한 침대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소녀는 나가보려 한다. 그 따뜻한 곳을 벗어나려는 건 소녀에겐 나름 큰 용기를 낸 것이다.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그러지 말라고 자꾸 막아서는 내 안의 다른 목소리를 듣는다.


아니, 난 지금 못 가.
매일 매일 거울을 보며 준비하지만, 뭐가 부족해 보여.
그걸 찾고 완벽해지면, 그때 나갈 거야.


아니, 난 못 가.
난 아직 가진 게 부족해.
좀 더 쌓고 풍족해지면 그 때, 나갈 거야.
지금 내가 움직이면 모든 게 무너질지도 몰라.


너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세상은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거울 앞에서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부엌에 있는 여자는 이 공간을 벗어나면 그곳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했다. 누군가는 세상은 또 그렇게 달콤하지만은 않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준비가 완벽해지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허점이 안 보일 때까지 망원경으로 뚫어져라 거울 속 자신을 쳐다만 보는 여자. 내가 아니면 이 집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계속 불안해하는 여자. 세상이 두려워 잔뜩 웅크린 여자. 그 모든 여자는 바로 나였다.


당신은 이게 어울릴 것 같아요. 한번 해봐요.

당신은 이걸 참 잘할 것 같은데 한번 시작해보지 그래요?


주변에서 이런 얘기를 때때로 들었다. 타인이 보는 내 모습과 스스로가 느끼는 능력에 대한 격차가 있게 마련이다. 좋게 평가해주는 말은 고마우나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 말처럼 하지 않는 내가 너무 스스로를 방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책이 들 때도 있다. 외부적으로 보이는 내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전문적으로 무엇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솔직히 더 지배적으로 했었다. 좋아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거기.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던 선택들.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모든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당연하게 빨래는 돌아가고, 개켜지고, 있어야 할 곳에 들어가고, 정리되고, 청결은 유지되고, 때맞혀 음식이 준비되고, 치워지고,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집안일은 그렇게 뫼비우스 띠처럼 끝이 없다.


엄마는 임무를 완수하고 가족도 당연하게 길들여졌다. 누군가는 꼭 해야 될 일인 건 안다. 그 역할에 대한 주인공이 나이게 된 것도 무척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집안일로 일상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끼는 어떨 때는 내가 혹시 투숙객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호텔 메이드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게 된다면, 낮에 내가 집에 없게 된다면, 이 공간은 또 아이들은 어찌 될까 하는 두려운 생각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몇 해 전 자격증을 따는 과정 중에 실습을 한 달 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출퇴근이라는 일상을 경험했다. 부대끼는 러시아워가 싫어 한 때는 걸어서 회사에 갈 수 있는 거리로 이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출퇴근 북적임을 너무 힘들어했는데 그 한 달간은 그것을 여지없이 느꼈었다. 한 달간의 워킹맘 체험. 익히 얼마나 힘든 일인 줄은 알았지만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실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실무 능력에 버벅거리며 위축된 내 모습. 이까짓 게 뭐라고, 사람들한테 내가 이런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괴감.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예전 신입 때 심정이 되살아났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지. 이겨낼 수 있을지. 내가 너무 나약한 건 아닌지.


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예뻐.
너무 걱정하지 마.
모두 머릿속 두려움일 뿐이야. 괜찮을 거야.


소녀는 마음속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내 문을 열고 나선다. 밖으로 나오니 따스한 햇살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을 느낀다. 소녀가 인형의 집을 활짝 열어 보여주는 건 보이고 싶지 않던 자기 속을 이제는 얘기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소녀는 예전 그녀처럼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는 다른 이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너도 한번 용기를 내보라고. 두려워 말고 나처럼 나와보라고 마치 손을 내밀듯이.


내 속의 모든 두려움을 인정한다. 웅크림으로 작아졌던 나날을 벗어날 때가 된 것도 같다. 안전하다 생각한 그곳이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붙잡고 있지 않다. 내 속의 많은 장애물이 이제는 됐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한 번 해보라고.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고. 너를 활짝 보여줘 보라고 다독인다.


설령 상처 받을 일이 생길지라도 괜찮다. 적어도 그 안에서 하나는 얻게 될 거니까. 가보지 않아 평생 아쉬움을 남기느니 그 하나를 배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장하리라. 아니 성장하지 않더라도 그 또한 어떠한가.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아물게 될 것이고 그곳에는 단단한 딱지가 생길 것이다.


나는 좀 더 많은 걸 느끼고 싶어.
내 두 발로 새로운 세상을 걸어보고 싶어.

주저하는 그대여, 마음을 먹었다면 이제 현관문을 활짝 열고 나가 보자. 내면의 소리를 외면치 말고 귀 기울여 보자. 분명 여전히 뜨거운 당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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