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가까운 지인이 은행나무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인천 장수동에 수령이 800년이나 된 나무라 했다. 800년이라는 그 모진 세월 동안 어찌 베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참으로 대단한 나무라며 서로 얘기한 기억이 난다.
묵묵히 한 자리에서 나무는 무엇을 보면서 살았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잠시 상상을 했다. 그 정도의 생명이면 어쩐지 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우리에게는 오랜 삶에 대한 경외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00세가 넘은 자에게 마치 현자를 바라보듯 세상 이치를 알려달라 세상은 요란하게 떼를 쓰기도 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그들의 물리적 백 년이라는 시야로부터 지혜를 얻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모아비는 천 년을 산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라고 한다. 그림책에서 전해지는 화사한 오렌지 색은 태초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모아비의 작은 씨앗에서 인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예요. 처음에는 바람이 실어다 놓아 준 작은 씨앗에 지나지 않았어요.
바람은 누구 심부름으로 작은 씨앗을 이 지구별에 실어다 주었을까. 운명인지 우연인지 씨앗은 그렇게 바람을 타고 와 생명을 시작하게 된다.
그 작은 우연이 얼마나 큰 일을 해낼지 처음부터 씨앗은 알고 있었을까. 지구 화학자 호프 자런의 「랩걸」에서 씨앗 하나의 강한 위대함을 새삼 느꼈었다. 그 씨앗 안에는 온 우주가 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어느 날 씨앗에서 어린 줄기가 뻗어 나왔어요.
나는 날려 가지 않으려고 땅을 꽉 잡았어요.
작은 씨앗도 이렇게나 애쓴다. 살아보려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버텨냈던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나와 자그마한 고사리 손으로 내 손가락 하나를 감싸던 내 아이의 첫날을 기억하게 한다. 당신만 믿고 이제 세상에 나왔으니 꼭 지켜달라는 다짐처럼 아이는 그렇게 내게 왔었다.
첫 번째 줄기요? 물론 기억해요. 뿌듯했으니까요.
천 년을 산다는 모아비도 첫 번째 줄기를 기억한다고 한다. 어찌 첫 순간을 잊을 수 있으랴. 첫입학, 첫졸업, 첫사랑, 첫키스, 첫아이, 첫니, 첫걸음마. 우리는 처음 경험하는 그 모든 매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뿌듯한 시작, 그래서 그 첫 순간은 설레고 짜릿하다.
나는 다른 줄기들도 빛을 향해 던져 자라게 했어요.
빛을 향해 던져지다. 이 그림책 전부에서 가장 멋 지고 아름다운 구절이다.햇빛을 찾아내 줄기는 고개를 귀신같이 빼꼼 내민다. 그처럼빛을 찾아내는 것은 그들은 빛을 향해 던져진 운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태어나서 어디로 던져졌을까. 어디를 보며 고개를 내밀고 자라야 할까. 우리는 잘하고 있는 걸까.
인간은 자연과 적이 되었고 그들에게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는 구절은 반면 너무 외롭고 슬픈 말이다.
결국 그는 불의 친구가 되었고, 모든 것의 적이 되었어요. 그는 강해졌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어요.
때가 되면 가로수는 그렇게 가지가 잘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알았었다. 그래야 나무가 더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는 줄 알았다. 이발 수준이 아니라 팔뚝이 잘려나간 것 같은 흉측한 모양새로 바뀌었어도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있으면 제 모습을 찾는 수순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건 내 무지였다. 얼마 전 가로수의 무분별 절단에 관한 뉴스를 봤다. 저렇게까지 심하게 잘라야 하나 싶었던 내 마음은 기우가 아니었다.
어떤 허허벌판에 어떤 사람들은 묘목을 빼곡히 심었다 한다. 그들은 숲을 만들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로 그 많은 나무를 심었을까. 많은 사람에게 공분을 사고 있는 실정이며 안타깝게도 그 나무들은 인간 욕망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을 거라 추측된다.품질이 좋은 목재라서 모아비도 한때는 산림 벌채의 희생양이었다고 한다.
사진으로만 보던 바오밥 나무를 진짜 그 앞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70미터까지 자랄 수 있다는 모아비에게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그 영물 앞에 서면 난 압도당하게 될까.
언젠가는 꼭 바오밥이나 모아비를 보러 가겠다는 소망이 오늘 내게 생겼다.너무 머나먼 소망인 것 같아 다짐을 좀 고쳤다. 가까이 올 가을에는 인천의 800년 된 은행나무를 보러 가리라. 모아비보다 200년 정도는 어리지만 뭐 그깟 대수랴.그 찬란한 노란빛 아래에서 나무가 속삭이는 옛이야기를 꼭 들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