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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자기다운 삶

: 서로를 보다

by 윌버와 샬롯

동물원 재정이 좋지 않게 되어 많은 동물이 팔리게 된다. 동물원 운영을 위해 관리자들은 동물로 위장한 채 운영을 재개한다. 북극곰을 연기하던 한 관리자는 부상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실제 북극곰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한다. 아마도 그래서 북극곰이 아팠었나 보다고. 영화 <해치지않아>의 스토리 일부다.


동물로 위장한 사람을 보며 놀리며 웃는 관람객, 겉으로는 코미디 영화지만 진정 어떤 것이 동물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

영화, 해치지않아


동물원 가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 힘없이 있는 동물을 보기가 힘들어서다. 창살이 있는 동물원보다야 나을까 싶어 사파리 투어라 이름 붙은 동물원도 가봤다. 그곳에 있는 동물이 전자보다 공간면에서는 좀 사정이 나을지 모르겠지만 재롱을 피고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에 신기하게 아이와 쳐다는 봤지만 이후 거기서 나오는 마음은 여전히 개운치 않았다. 쉬지 않고 들어오는 다른 차에 대고 똑같은 동작을 반복할 것을 생각하니 그들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저 멀리 아프리카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 그런 곳에서나마 난 죄책감 없이 동물을 바라볼 수 있을. 그것마저도 동물에게는 동의받지 못한 인간의 일이니 동물 입장에서는 모를 일이겠다. 세렝게티의 얼룩말은 행복할.


야생 동물과 평화롭게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교육 목적이라는 동물원의 존재가 그 목적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는 구실일까.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보다 실체를 보는 것이 훨씬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맞으나 우리 안에서 동물이 겪는 참담한 현실을 외면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경험일지는 의문이다.


가둬놓은 동물을 관찰하기보다 직접은 아니더라도 VR 같은 첨단 기술을 이용해 생생하고 더 실감 나는 체험이 더욱 활성화할 지혜가 필요하다. 동물 모두가 오래도록 지구에서 함께 살 수 있으려면 바뀌어야 한다.


이 그림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흔하디 흔한 환경과 동물에 관한 메시지겠거니 했다. 이미 주제를 알고 봤는데도 이 짧은 그림책은 동물원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으로 나를 또다시 먹먹하게 했다.


바람처럼 초원을 달리는 동물, 치타.
글쎄, 난 잘 모르겠어. 그렇게 달려 보지 못했거든.


태어난 존재로서 그대로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그러지 못하고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혹은 본연의 모습조차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는 건 또 어떤 것일까.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행위들이 얼마나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인지 그림책은 또렷하게 말하고 있다.


얼마나 자기가 빠른 존재인지 동물원의 치타는 알지 못하며, 몇 킬로미터 씩 날 수 있는 쇠홍학의 날개는 그것을 하지 못한다.


구름처럼 하늘을 나는 동물, 쇠홍학.
여기서는 먹이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 그래도 가끔 날고 싶긴 해.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날 수 없지만.


기다랗고 가는 멋진 분홍빛 한쪽 다리로 서있는 홍학을 보며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디에서도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책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저 원래가 서있기만 할 수 있는 새인 줄로만 난 알고 있었나 보다. 새임에도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새롭게 느껴졌다니,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행하고 있는 것인가!


바람처럼 달리지도, 해처럼 솟아오르지도,
산 위로 바다 위로 뛰어오르지도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동물, 인간.

너희 사람은 아주 똑똑하다고 들었어.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이랑
자연을 파괴하는 능력
모두 뛰어나다고.

표지에 보이는 그림책 제목은 '(동물들이 나누는 이야기) 서로를 보다'이다. 제목만 보고 동물들 서로가 얘기를 나눈다고 난 오해했다. 그러나 그 '동물들'이라는 말은 동물과 인간의 대화였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지 못한 아둔함으로 인한 오해이다. 아주 똑똑하다는데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면서도 파괴하는 능력 모두가 뛰어나단다. 이런 씁쓸한 아이러니라니.


동물이지만 신체적으로 가장 나약한 존재인 호모 사피엔스는 축복인지 재앙인지 어쨌든 우월한 위치를 점유했다. 지구 상에 남아 있는 동물이라고는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가축들뿐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건지, 어쩔 수 없는 건지 난 모르겠다. 인간의 과도하고 무한한 이기심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건지도 마찬가지다.


그림책은 여러 동물을 보여주며 '자기다운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그 동물들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동물을 멸종시키고 학대하는 인간의 행위 또한 인간의 자기다운 삶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똑똑하지만 좀 더 지혜로웠다면 인간은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어떤 수는 없을까. 이제는 너무 늦은 걸까. 우리에게 기회가 다시 없는 걸까.


동물원에서 생각했습니다. 치타는 치타답게, 가젤은 가젤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의 모든 생명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윤여림)

그림을 그리며 동물들의 삶을 따라 먼 곳까지, 그들의 마음속까지 여행을 다녀온 느낌입니다. 이 책이 우리와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 귀와 눈을 열게 하는 작은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유정)


오늘은 고양이 학대에 관한 뉴스를 들었다. 글과 그림을 그린 작가 두 분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가슴에 박힌다.


알고 있니?
'콘도르'란 말은 잉카 말로
'어떤 것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란 뜻이래.


영화 <해치지않아>에서 동물 탈을 쓰고 인간 동물은 관람객 동물을 바라본다. 동물원 우리 안과 밖에서 두 동물은 서로를 마주 보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책 앞과 뒤표지를 활짝 펼치면 그 둘은 서로 반대를 바라보고 있다.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두 동물의 미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서둘러야 한다. 다시 등을 돌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자기다운 삶을 찾아야 한다. 어떤 것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생명을 가진 존재 그 누구나가 원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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