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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미운 다 큰 아이가 봤으면 하는 그림책

: 엄마 도감

by 윌버와 샬롯
엄마는 아기와 함께 태어나는 신생 인류입니다. 아기 성장에 관한 보고서는 쌓여 가고 있지만 신생 엄마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요. 왜 누구도 갓 태어난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요. 모든 것이 처음인 세상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을 갓난 엄마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림책 끝에 작가는 이 책을 만든 의도를 명확하게 설파했다. 작가 말처럼 아기에 대한 책은 숱하게 존재한다. 나 또한 그 육아책들을 닳도록 읽었다.


육아책 내용과 아이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면 나는 훌륭한 엄마가 되었고 책과 다른 아이를 발견하면 못난 엄마가 되어 있었다. 책으로 육아를 배운 나는 그렇게 웃고 울고 희망을 찾고 좌절했었다.


책이 정한 기준처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누군가 내게 말해줬더라면 난 좀 편한 육아의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혼자서 아이를 키웠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래도 난 책에 의지했을 것이다. 책과 육아 커뮤니티 카페가 그때는 내게 오은영 선생님이었고 친정 엄마나 다름없었으니까.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처음인 그 시절 누구나가 그러지 않을까.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는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닌가. 내 손가락을 꼭 잡는 그 어린 생명이 옆에 있는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얘도 나밖에 없는데.

엄마는 태어났습니다. 나와 함께.
태어나서 처음 본 엄마 얼굴은 내가 배 속에서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릅니다.


엄마 배 속에서 바로 나온 아이가 예쁘지 않듯 엄마 또한 그랬다. 맞다. 엄마도 그날 새로 태어난 거다. 그래도 명색이 그림책인데 이렇게까지 엄마를 후줄근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큼 아름답지 않게 엄마를 그린 그림책이 또 있을까. 근데 실제로 엄마는 그렇다. 쭈글쭈글한 상태의 아이를 보고 낯설었던 것은 엄마만이 아님을 이 그림책을 보고 깨달았다. 갓 나온 아이 역시 엄마를 보고 적잖이 실망했을 수 있겠다.


아이 옆에 네모나게 송장처럼 누워 있는 엄마를 보니 감정이 이입되지 않을 수 없다. 그녀 발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아무리 춥다 해도 잘 때 수면양말을 신어본 적이 없었다. 출산 후에는 찬바람을 쐬면 안 된다 하길래 아이를 낳고서 처음으로 수면양말을 신어봤다. 신기는 신었는데 벗을 때가 문제였다. 몸의 변화가 얼마나 예측불가였는지 어느새은 부어 그 헐렁하던 양말이 꽉 끼었다. 낑낑대며 겨우 양말을 벗던 기억. 벗은 맨발을 보고 퉁퉁 부어 있어 너무 겁나고 놀란 가슴. 그림책 속 기운 없이 누워있는 산모를 보니 그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괜찮은 걸까요?


아니, 괜찮지 않아. 아가야, 너도 세상에 나오느라 힘들었겠지만 엄마도 만만치 않았어. 너도 엄마 얼굴만 보더라도 알겠지. 그러니 앞으론 너의 생일에 케이크 초를 후-하고 엄마랑 같이 꼭 불자꾸나. '둘 다 고생했어' 하고.


출산하며 결정한 일들 중에 후회하는 한 가지는 출산 후 모자병동에 있었다는 거다. 아이를 낳자마자 엄마는 아이와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몹쓸 모성애 강박 때문이었다. 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가진 아이에 대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니 어떤 누구도 내 결정에 반박하지 않았다.


모자병동에서의 밤은 엄마와 아이와의 평온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어찌나 힘들던지. 그렇잖아도 고단한 몸인데 아이를 밤새 볼 생각을 했다니. 무지했던 산모에게 아이를 맡긴 그 시절 병원 시스템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아니 힘들면 도와달라고 요구했어야 하는데 내가 미련했다. 왜 책은 내게 적당한 모성애는 가르쳐주지 않았나. 이후 난 아이를 낳는 가까운 이에게 내 시행착오를 꼭 얘기해준다. 절대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말라고. 타인의 도움을 기꺼이 받으라고.


엄마의 몸은 구석구석 쓸모가 많습니다.


갓난아이에게 엄마 몸은 우주와 같다. 2인 3각 경기처럼 아기와 엄마는 한 팀이다. 모유나 분유를 먹이고 적어도 30분 이상은 안고 트림시키기. 30분 이상을 업거나 안고 재우기. 손 탄다고 많이 안아주지 말라고 누가 그랬어도 아이가 울면 달리 방도가 없다. 독하게 외면하려 해도 엄마는 결국엔 아이에게 지고 만다. 팔이 아파 안는 게 힘들면 낮잠을 재우기 위해 유모차에 태워 동네를 몇 바퀴 돌았다. 겨우 아이가 잠들면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 것이 유일한 바깥나들이, 쉼이었다. 아이가 잘 때 가장 예쁘다는 말은 실은 마침이 없는 육아에 대한 꿀 같은 쉬는 시간이 주워진다는 다른 말이었다. 누군가는 맘충이라고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한다지만 유모차 끌고 카페라도 갈 생각을 그때 왜 난 못했을까? 차 한 잔 잠깐의 여유도 엄두가 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의도치 않은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잠도 잘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니 살이 쏙 빠지는 건 당연하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해서야 엄마도 아이처럼 살이 붙기 시작했다. 그제야 엄마는 제 몸 건사하는 사람 꼴이 되어갔다.


그래도 내 몸 위에서 아이가 자라던 그 시절이 살짝 그립기도 하다. 내 안에서 자고 먹고 놀고 하던 그때가 몸은 힘들었어도 아이의 까르르 천사 미소를 가장 가까이서 본 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해도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내게 묻는다면 거절할 것이다. 정말 힘들었다.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시절 나를 조금이나마 도와주기 위해 좁은 내 집으로 찾아오던 친구와 가족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난 그들에게 영원히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내 힘든 시절을 함께 해주었기에. 나를 먹이려고 음식을 해주고, 나 대신 잠시라도 아이를 안아주던 그들을 잊을 수 없다. 반대로 내 바람처럼 해주지 않던 가족에겐 꽁한 마음이 직까지 소환될 때가 있다. 그 뒤끝이 꽤나 오래간다. 가장 약할 때 느낀 설움은 쉬이 지워지지 않나 보다.



예전에 아이가 미워질 때 봐야 하는 그림책에 관해 글을 썼다. 그러나 오늘 이 그림책은 그 반대다. 엄마가 미운 아이가 꼭 봤으면 하는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을 보면 조금은 아이가 엄마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지 않을까? 밉고 싫어도 이렇게 고생해서 자기를 낳고 키웠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엄마라는 족속은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거구나 하며 잠깐이라도 좀 불쌍히 봐주지 않을까?


어쩌면 여전히 아이와의 분리불안을 느끼는 덜 자란 엄마만의 바람일 수 있다. 얼마나 아이가 자라야 그런 마음이 들게 될까?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그냥 엄마와 아이가 각자의 그림책을 보고 서로를 다독여야겠다. 우리 모두 애썼다 하면서.


조만간 둘째를 낳을 조카에게 이 그림책을 선물하려 한다. 근처에서 아이를 돌봐주는 헌신적인 시부모가 계시고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82년생 김지영'보다는 형편이 좀 나아 보이는 조카다. 그럼에도 얼마 전 통화에서 조카의 목소리에는 힘듦이 묻어났다. 어찌 그러지 않을까. 부모 됨이, 삶이라는 게 그리 녹록하던가. 현재를 치열히 살고 있는 조카에게 이 그림책은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아이를 갖고부터는 긴 머리카락을 가져보지 못한 엄마. 그 모든 위대한 엄마들에게 토닥토닥 위로하며 선물하고 싶은 그림책 만났다. 예쁘지 않은 그림책. 그래서 더 와닿는 그림책. 불모지나 다름없던 엄마라는 신생 인류에 대한 남다른 작가의 시선에 엄지 척을 전하고 싶다.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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