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어요. 즐겁고 밝은 기분이 사라지고, 어둡고 침침해졌어요. 슬픔이 기쁨을 밀어냈지요.
그림책의 이 구절을 보고 요즘의 내 처지가 이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춘기여서 그런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딸은 그림책 속 버지니아와 비슷하다. 엄마 아빠 동생 가족 모두가 싫단다. 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했는데, 지금 상황은 이렇다. 우린, 아니면 난, 뭘 잘못해서 아이가 이런 걸까. 정말 힘이 들 땐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래야 하는지 원망할 때도 있다.
여기 버지니아는 왜 늑대처럼 굴었을까? 이 그림책은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와 실제 그 언니인 바네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 버지니아가 가장 힘들 때 곁에 바네사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동생 버지니이가 달라졌어요.
까만 늑대 형상으로 침대에서 침울하게 누워있는 버지니아가 보인다. 거기서 내 아이 모습도 보인다. 왜 그런지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서는 모든 게 마음에 안들뿐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고 아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하며 좌절한다. 늑대가 되어 버린 한 사람으로 인해 나머지 셋 모두가 힘이 든다. 넷이 같이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이러다 모두 늑대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도 든다.
내가 동생을 그리자, 동생은 늑대처럼 그르렁거렸어요.
버지니아는 정말 자기가 늑대인 줄 아나 봐요.
물론 부모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찌 부모가 돼서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계속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심정은 어쩔 수 없다. 머리로는 알지만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이와 화산 같은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면 또다시 리셋. 부모는 저 작은 아이 하나에게서 밑바닥까지 내려앉는 기분을 느낀다. 나이를 먹음에도 사람이 참으로 저열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누구에게도요.
나는 동생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면, 동생은 다 먹었어요.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어떤 것도 동생을 달래지 못했어요.
바네사는 동생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도 그랬다. 맛있는 음식, 근사한 여행, 갖고 싶은 물건. 안 해 본 것이 없지만 그때뿐이었다. 아이는 영악하게도 그때그때 자기가 취할 건 취했고 변화는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부모는 아이에게 절절맨다.
나는 가만히 동생 옆에 누웠어요.
그러나 우리는 여태 너무 쉬운 것만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가만히 동생 옆에 누워 얘기를 듣던 바네사처럼 난 아이 얘기를 차분히 들어준 적이 있었을까? 어느 날 아이와 전쟁을 치른 후 새벽에 아이의 좁은 침대에 올라가 아이를 꼭 안고 잤었다. 아이는 귀찮다 했지만 완강히 밀어내진 않았다. 제발 아이를 편하게 해 주세요, 하고 절절히 기도하면서.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버지니아에게는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언니 바네사가 있었다.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가져다줄 수는 없었더라도 그 조금의 근처라도 갈 수 있게 바네사는 행동한다. 세상에 있지도 않은 곳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버지니아. 만약 나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두라고 대뜸 타박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힌트를 그동안 주고 있었을까? 여러 번 눈치를 줬는데도 난 알아채지 못하고 있던 걸까?
우리 집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어요. 어둡고 우울하던 것이 사라지고 환하고 즐거워졌어요. 슬픔 대신 다시 기쁨이 찾아왔어요.
집 분위기가 밝아졌다고 말하는 바네사. 그림책은 해피엔딩이지만 내게도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스무 살이 되면 신기하게도 아이는 밝게 돌아올 거라는 어느 육아책의 말을 믿어야 할까? 그때까지 난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절이 정말 지나가는 태풍처럼 단순한 사춘기이기를 바랄 뿐이다. 혹시나 그게 아니고 스무 살이 되어도 늑대인 아이가 계속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엘리베이터에서 엄마에게 뽀뽀하는 아이, 다정한 전화 목소리, 사이가 좋은 형제, 끔찍이도 서로 아끼는 가족. 어디에서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되면 난 그저 부럽다. 그런 가족을 꿈꿔 여기까지 겨우겨우 왔는데 실패했다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대가를 바라고 가족을 일군 건 아니지만 지금 같은 힘듦은 상상도 못 했다. 아이는 유아기 때 부모에게 준 사랑으로 평생의 효도를 다한 것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난 그 사랑이 벌써 약효를 다했다.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엄마가 과연 온당할까.
우리들은 어떤 이유로 만나게 된 걸까. 이 한 세상에 어떤 일을 하라고 세상에 내던지게 된 걸까. 그 수많은 사람 중에 겨우 네 명이 만났을 뿐인데 왜 우리는 이렇게나 안달복달할까. 어쩌면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어느 집이고 걱정거리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너무나 예민하게 난 사소한 것들에 반응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아이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세상으로부터의 유일한 보호막인 가족을 아이가 믿어줬으면 좋겠다. 밉기도 하지만 우리 딸에게 난 바네사가 되고 싶다. 그리고 버지니아처럼 딸이 내 손을 꼭 잡아주는 때가 꼭 왔으면 좋겠다.
아이는 차려놓은 아침을 그대로 두고 학원에 갔다. 엄마는 또 속이 부글부글하다.
그래도 얘야,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렴. 언제나 너에게 지고 마는 엄마는 기다릴게. 그냥 우선은 우리 그렇게라도 살아보자. 너의 블룸스베리에 어리숙한 엄마는 여전히 데려다줄 수는 없어도 그래도 옆에서 널 기다릴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유를 찾진 않을게. 지금을 살뿐이야. 우리 그냥 그렇게라도 해보자.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머릿속엔 너로 가득한 엄마를 조금이라도 불쌍히 봐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