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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 그 꿈들

by 윌버와 샬롯
2003년 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하자 세계 곳곳에서 인간방패를 자청한 이들이 요르단으로 떠났다. 한국에서도 평화운동가들이 인간방패를 자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동화작가 박기범이 있었다. 어쩌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박기범은 충분히, 아니 어쩌면 당연히 그럴 사람이었다. 그가 이라크로 떠난 뒤 우리는 공부방 아이들과 손 피켓을 만들어서 대학로로, 광화문으로 나갔다.

<작가, 김중미>


쉽지 않은 그림책을 만났다. 생각보다 글밥 분량도 적지 않았다. 책을 덮고서는 눈물이 났다.


이야기는 미국이 이라크 침공 무렵부터 시작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은 했지만 실제 내가 아는 건 디테일에서 한참 부족했다. 그림책에서는 가난하지만 꿈을 간직하고 사는 우리 이웃과도 같은 평범한 이라크 사람들, 단지 그곳의 평화를 바라며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보인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내 이름은 알라위. 나는 축구 선수가 될 거예요.
내 이름은 핫싼.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 높은 사람들 얼굴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심각한 얼굴로 자기들만 알아들을 수 있게 수군거렸습니다.
저 나라에는 아직 써먹지 않은 땅속 자원이
어마어마하게 묻혀 있다고 말이지요.


그 시절 우리는 불꽃놀이처럼 밤하늘에 포탄이 날아가는 장면을 뉴스에서 생중계로 지켜봤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게임 화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하늘 아래에서 누군가는 공포에 질려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던 것 같다. 민간인이 있는 곳에서 설마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누군가는 그런 전쟁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고 그곳으로 떠났다. 또 누구는 편히 밥을 먹고 잠을 잤다. 개인 선택의 문제지만 아무렇지 않게 영화 보듯 TV로 전쟁을 지켜봤던 그때의 내 무지가 지금은 너무 부끄럽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그 밤의 폭격,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땅에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힘이 센 나라 높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정의의 용사라 외치며 평화를 운운했다. 정의 따위가 있었을까. 단지 자기네 잇속의 경제논리만 있었을 뿐.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겠다.

해 저물녘 티그리스 강변으로 나와 보세요. 거기에 그림처럼 예쁜 연인이 거닐고 있을 거랍니다.
나는 파라예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답니다.


소박한 꿈을 간직하며 살던 하나하나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집을 짓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그들은 꿈꿨다. 어찌 보면 정말 별 거 아닌 소망들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렇지 않게 그들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단한 사람들은 그 꿈들을 빼앗았다. 무슨 권리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알아요, 왜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아침마다 독재자의 사진을 보며 뜻도 모르는 맹세를 해야 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에요.
저기 양 떼를 몰고 가는 이웃집 오빠가 오마르예요. 오마르 오빠도 나도 동물을 아주 좋아해요


그럴 만하니 그러는 거겠지!


대다수 사람들의 이런 심드렁한 말은 직무유기나 다름없었다. 실상 그럴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놀고 있는 무기를 팔기 위한 자, 빼먹을 것이 보이는 눈 밝은 자, 그들 빼고는 누구도 바라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너무 먼 나라 얘기여서, 사는 게 바빠서,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이 그리 나쁜 일이겠어 하고. 정말 순진한 사람 같으니. 설령 진실을 안다고 했어도 개인이 무얼 할 수나 있었을까.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대장간 할아버지 손놀림에 정신을 팔다 보면 언제나 이렇게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니까요.
내 나이 벌써 아흔이오. 이름은 무스타파. 다리에 힘이 없어 지팡이 없이는 애를 먹어요.


전쟁이라는 것도 두 차례나 겪었다오.
당신네들이 독재자라 하는 이 때문에
벌벌 떨며 숨어 살았던 적도 있네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이 있는 거라오.

나랏일이 옳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그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안다오.
하지만 그걸 바로잡는 건
이 땅에서 모진 삶을 살아온 이들이
스스로 해낼 때에만 가능하지요.
그건 저 길 건너 올리브 나무도 다 아는 일이랍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그 나라 사람들도 모르지 않았다.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그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정의의 용사는 당사자들의 몫으로 남겨져야 한다. 아흔 살의 무스타파 할아버지 말씀이 지워지질 않았다. 옳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비단 이라크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미얀마도 아프가니스탄도 어쩌면 나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고 강대국이 직접 나서는 일이 결코 능사가 아님을 알았다. 올리브 나무도 아는 일을 난 여태 몰랐었다.


우리네 삶은 바닥까지 파헤쳐졌고,
그 삶으로 지탱하던 위태로운 평화마저
이제는 깡그리 잃고 말았소.

수십 년 뒤면 다다를 수 있는 그것을,
이 전쟁으로 하여
수백 년 뒤에나 닿을 수 있게 되고 말았다오.
이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건 오로지 전쟁뿐이라오.
이제껏보다 더 질기게 이어질 혹독한 시간.


전쟁은 전쟁을 낳았고,
증오는 또 다른 증오로 이어졌습니다.


총을 든 사람도, 그 앞에 선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던 일. 단지 명령한 자만이 진실 너머를 알고 있는 이 불합리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용서를 비는 군인들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고통을 준 사람, 그로 인해 아무 이유 없이 고통을 받은 사람, 서로가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진짜로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악당을 물리치는 착한 전쟁이라는 말에
마음씨 착한 이들이 그 전쟁에 뛰어들곤 하였고,
이편의 마음씨 착한 이들이
저편의 마음씨 착한 이들에게 총을 겨누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착한 전쟁이란 것이 진정 존재할 수 있을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 세상 일에 여전히 무지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김중미 작가처럼 아이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피켓을 들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림책을 꺼내 우리 아이와는 같이 읽고 얘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마을 아이들을 보살피는 살람 아저씨와 조그만 자기 집을 갖고 싶었던 구두닦이 핫싼, 그리고 그곳의 친구들에게 사랑을 전한 박기범 작가의 마음도 아이와 함께 느끼고 싶다. 나중에 아이가 세상의 영웅이 되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남의 꿈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길을 잃어 울고 있는 누군가에게 가끔은 엄마나 언니가 되어주는 그런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전쟁이 있던 그곳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꿈들이 뭉개 뭉개 잘 자라고 있길 간절히 기도해본다.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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