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곡차곡
“아카시아 향 맡으러 우리 다시 와요.”
작년에 한양 도성 길을 동네 언니와 다녔다. 어느 날은 남산을 걸으며 아카시아 나무가 즐비한 곳을 지나쳤다. 산길을 하얗게 수놓은 꽃잎들을 보니 한 주만 일찍 왔어도 향을 맡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무는 어디 가지 않으니 후일을 기약하면 된다. 딱 일 년만 기다리면 되니까.
“언니, 이제 라일락 향이 나요. 아카시아 때를 놓치지 않게 날을 잡아야겠어요.”
동네를 걷다 진한 라일락 향에 매료됐다. 나무에서 몇 미터도 더 떨어져 있었는데 달콤한 향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는 거다. 문득 작년에 놓친 아카시아가 떠올랐다. 그래서 급히 메시지를 보낸 거다.
남산은 아니지만 언니는 서대문구 안산의 아카시아 군락지를 찾아냈다. 길치인 나보다는 길눈이 밝은 언니를 따라 새로운 곳으로 하루치 여정을 떠났다. 마침 목적지는 축제의 날이었고 우리는 어린애처럼 즐겼다. 그럴듯한 인공 폭포에 가슴이 시원해지고 도심의 산에서 만난 커피 트럭이 반가워 잠시 멈춰 커피를 샀다. 잘 조성되어 있는 데크길 덕분에 커피를 마시면서도 산책이 가능했다. 산이 주는 신선한 피톤치드와 따스한 커피와 편안한 발걸음,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순간에 취해 잠시 길을 잃기도 했지만 우리는 정상이 목적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다시 돌아가 다정한 여러 산행인에게 길을 물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빼곡한 메타세쿼이아의 향연. 마치 어느 먼 유럽 숲 속에 들어온 착각이 들 정도로 장관이었다. 사진도 여러 장 찍었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한참을 바라봤다. 원래 목적이던 아카시아는 그 이파리조차 아직 작아 꽃과 향은 언감생심이었지만 우리는 메타세쿼이아 한 장면으로도 충분했다. 이거면 돼. 오늘은 이걸로 됐어.
내려오는 길 널따란 쉼터에서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소풍처럼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언니, 다음엔 우리도 여기서 김밥 먹어요.”
이날 아카시아 향은 만나지 못했지만 우리는 또 어딘가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감탄을 할 것만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계절의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이겠지.
우리만의 연례행사가 생긴다는 건 1년이 더 자주 즐거워진다는 걸 뜻했다. 그로 인해 봄을 기대하고 여름을 기대할 수 있었다. 우리만의 작은 의식으로 계절을 기념할 수 있었다.
<제철 행복> 김신지
절기마다 즐거운 계절 숙제를 안겨주는 <제철 행복>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법에 대해 한 수 배웠었다. 그리고 순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우리의 삶도 이 모든 시간들이 쌓여 가는 여정이라고 여기 <차곡차곡> 서선정 작가도 말했듯 순간의 시간들을 기민하게 포착하며 살리라 또 한 번 마음먹는다.
“산에 아카시아 핀 거 맞나 봐.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아카시아 향이 난다.”
나의 아카시아 통신원에게서 새 메시지를 받았다. 제철 행복을 이대로 보낼 수야 없지. 자꾸만 손짓하는 아카시아를 놓치지 않으려 우리는 가볍게 비온 뒤의 동네 뒷산을 올랐다. 바람에 실려 오는 달큼한 향을 찾으러. 아, 이거구나. 언니, 나도 이제 향이 느껴져요.
드디어 5월의 약속을 우리는 지키고야 말았다. 제철 행복을 잡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