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정도 엄마는 스스로를 점검하기 위해 미용실을 간다. 기분 전환도 아니고 오롯이 그저 정수리가 희끗하게 보이는 새치를 감추기 위해서다. 재채기와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고 했던가. 꼬박꼬박 자라나는 머리카락 새치도 만만치 않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하얗게 인사를 하고 나와 누구를 만나기만 하면 상대방이 엄마 머리만 쳐다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요즘 트렌드가 그레이 헤어하는데 아직 그런 과감한 시도를 하기에는 엄마 나이가 아직 애매하다. 엄마보다 나이가 더 있는 사람이 자연산 까만 머리칼을 가졌다면 그는 단연 엄마의 부러움 대상 1호다. 그런 사람을 볼 때면 한참을 쳐다보게 된다. 어려 보이고 싶어서 염색을 하는 건 아니지만 빼놓고 지나칠 수 없는 이 굴레가 조금은 힘들다. 오늘 엄마를 맡아준 미용사 분께 "다음 달에 또 만나요."라고 기꺼이 환하게 인사하며 나오지만 한 달 뒤를 기약해야 하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염색이 되길 기다리며, 책과 주스가 있어 그나마 덜 지루하다.
은행 일도 보고 빵집으로 가 전날 아이가 콕 집어 먹고 싶다고 한 빵을 찾는다. 하교하면 먹일 아이 간식을 산다. 약국에 들러 어제 정리한 유통기한 지난 약을 맡기고 다른 상비약도 산다. 잠시 중간에 집에 들러 점심을 해결한다. TV 뉴스를 틀어놓고 나물 반찬 몇 가지와 고추장에 들기름을 조금 넣어 비벼 먹는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대출한 책이 반납 기한이 임박해 다시 집을 나서 도서관으로 향한다. 아이가 볼 책과 엄마가 볼 책을 검색해서가 이리저리 책을 찾아 헤맨다. 오늘따라 고른 책들이 꽤 무겁다. 책 때문에 어깨는 이미 무겁지만 저녁거리도 마땅치 않아 지나는 길에 마트도 들려본다.
여름 내내 신호를 기다리며 그늘을 만들어 준 그늘막이 참 고맙다.
은행, 미용실, 빵집, 약국, 도서관, 마트.
바로 오늘의 여정, 이것은 오늘 하루 볼 일을 보러 부산하게 돌아다닌 곳이다. 집을 나선 김에 모든 일을 해치우고 들어오는 습성의 발로다. 상큼하게 아침을 시작하며 길은 나섰는데 여정의 끝은 도서관에서 빌린 무거운 몇 권의 책과 마트에서 산 당장 오늘 저녁에 먹을 몇 개의 신선품을 들고 기진맥진 집에 들어왔다.
많이 걸을 때는 편한 신발을 신어야 하는데 나름 미용실에 간다 해서 골라 신은신발이 발볼이 좁았다. 적당치 않은 신발을 선택해 길을 나선 것은 오늘의 이 긴 여정을 예상치 못하고 우습게 본 탓이다. 발가락이 욱신거려 더 기운이 빠진다.
마트에서 사온 싱싱한 귤로 떨어진 당을 채워본다.
아이가 집에 오기 전까지 낮시간을 온전히 집안일이나 가족을 위해 쓰고 휙 보내고 말면 내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가족을 위한 볼일을 보러 나오기도 했지만 난 걸으며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혼자 걸으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머릿속도 말끔히 비우며 사유할 수 있다. 내 존재를 오래 걷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분명 그렇다. 걷는다 해서 돈이 되거나 누가 인정해주는 건 아니지만 다리가 욱신거림에도 내가 회복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