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천하.7(FIN)

by 최해이


아무도 타지 않는 듯했다.

나이가 많으니 예전 같지는 않을 터였다.

마방 앞에 걸어져 있는 먼지 묻은 재갈을 병원복으로 슥슥 닦고는 채워보았다. 손이 굳어 아둔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굴레를 채우고 보드라운 귀를 빼내었다. 앉아있는 백일천하의 등에 안장을 올리자,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한쪽 발로 지탱하고 한쪽 몸을 백일천하의 덩치에 의지하며 안장 끈을 조였다. 힘이 드는 것인지 다시 바닥에 털썩 앉아버린다.


잠들어 있을 새벽에 얼떨결로 굴레와 안장을 차게 된 백일천하는 아무래도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려 희월을 쳐다본다. 미안해. 아, 너무 웃기다. 뜬금없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 깔깔 웃는다. 안장 위에 앉은 채, 몸을 숙여 백일천하의 목을 안고 바짝 붙어 누웠다. 한참을 그리 있는데, 백일천하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재빠르게 내리려고 하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고군분투하는 사이 벌떡 일어나 버린다.


벌떡 일어난 백일천하는 늠름히도 서 있었다. 공연한 기대에 손을 뻗어 마방 문을 여니, 걸어 나간다. 실내 승마장은 문이 닫혀있어, 뒷산 쪽의 벌판으로 향했다. 그리도 쏘다녔던 언덕이 보인다. 초겨울의 바람이 삽상하게 불어온다.


“와, 내가 너 한번 타겠다고 저길 얼마나 뛰어다녔는데… 생각해 보면 나도 대단하다니까.”


순간, 잠시 물 밖으로 나온 숨구멍이 다시 수면 아래로 잠기는 느낌이 든다. 희월이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다. 몸에 균형이 맞지 않을 텐데 그나마 이렇게 앉아있을 수 있는 이유가 사고 전 운동했던 결과라 생각하니 덧없게 느껴진다. 꿈인가…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슈퍼문이 떴다는 어제 본 뉴스가 상기된다.




벌판에는 가로등 하나 없었지만, 달빛의 환한 아지랑이가 자욱하다. 천천히 걸어가니, 마치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 느낌에 묘해진다.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은색빛 머리카락이 백일천하의 갈기에 듬성듬성 보인다. 손을 올려 얼굴에 가져다 댄다. 눈을 슥슥 비비며 닦아내고 또 닦아낸다. 옷소매가 축축해져 온다.


백일천하의 배를 쿡 찌르자,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희월은 ‘백일아 달릴 수 있겠어?’ 하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어차피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한번 더 둥글게 찔러 구보로 바꾸었다. 지탱할 허벅지의 힘이 없으니 백일천하에게 온몸을 맡긴다.


시작한 지 4초도 되지 않아, 새벽서리에 젖은 축축한 풀 바닥에 낙마한다. 등이 축축해져 온다. 와, 와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처음이었다. 낙마를 한 것이. 백일이도 당황했는지, 속도를 줄이고 되돌아온다.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와- 진짜 너무 웃기다. 하하하. 사방이 온통 웃음소리였다. 단 한 명이 이렇게나 많은 웃음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잠들어 있던 죽음이 척추뼈를 타고 올라온다. 죽음으로 인해 삶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고통을 통해 행복을 느끼듯.



속절없이 떨어진다. 끊임없이 떨어지고, 수없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흙바닥에 자꾸만 꽃잎 같은 자국이 남는 것이다. 하나둘, 흔적이 남을수록 웃음소리는 늘어만 간다. 스산한 바람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스친다. 매끈하게 다져진 바닥을 침대 삼아 누워있는 희월의 얼굴은 환했다. 희월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만 텅 빈 것과 채워졌기에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큰 차이였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머릿속이 소용돌이치며 바람을 가른다. 다시 올라탄 희월이 등자를 감각 없는 다리에 꽉 묶는다. 백일천하의 몸에 걸려있던 목도리를 빼내어 다리에 두어 번 더 감았다. 어쩐지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은 기분이다. 충만하다. 꽃잎 자국의 모래알들이 백일천하의 발굽 사이로 들어가 바스락거리며 낙엽처럼 부서진다.


잠이 들어있던 마방의 말들이 기마대의 돌격하는 듯한 거대한 발굽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난다. 달을 향해 울부짖는다. 어느덧 백일천하의 속도가 몸에 익숙해지자 기시감이 든다. 마치 저항 하나 없는 공간을 유유하게 부유하는 느낌. 고삐를 안장에 걸고, 양팔을 좌우로 뻗어 공기를 느꼈다. 어떠한 에너지도 흐름도 거슬리지 않았다. 마치, 진공상태의 공간을 달리는 기분이다.


언젠가 허벅지 힘을 기르려고 달리던 그 언덕을 백일천하가 올라간다. 어느덧 백일천하는 용마가 되어있었다. 언덕의 평지에 다다라 어두운 숲길을 내달린다. 얼기설기한 커다란 나무의 가지와 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꽃처럼 만개한다. 말굽 소리가 아득한 구름 사이로 흘러나온다. 내 다리가 되어줘서 고마워 백일아. 희월의 얼굴에 섬광이 번진다.


바람을 가로지르는 와중, 팔을 뻗어 백일천하가 쓰고 있던 굴레와 재갈을 풀었다. 고삐가 사라지자 허리를 숙여 백일천하의 따뜻한 목을 끌어안는다. 가벼운 움직임, 질곡에서 벗어났다. 희월이 뛰고 싶어 하는 만큼, 움직이고 싶어 하는 만큼 백일천하는 마음껏 달렸다.





사고후유증으로 폐쇄병동에 있던 음주뺑소니의 피해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날한시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말 한 필이 사라졌다. 백 일이 지나자, 가해자는 알 수 없는 꿈에 시달렸다. 한 형체가 끊임없이 자신의 몸 위를 뛰어다니는 꿈. 온 삭신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말처럼 울어대는 것이다.


어느덧 마장의 수석 교관이 된, 중년의 서교관은 꿈을 꾸었다. 먼 언덕, 곁에만 가도 눅진할 정도로 오래된 적갈색의 고목이 있다. 한 형체가 기대어 앉아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이상하다. 오로지 나무는 아닌 듯하다. 언덕은 까마득히 멀었지만,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구분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평화로워 보인다는 것이다. 태초로 돌아간 듯한 마음. 어쩐지 압도된 서교관은 자연히 합장한다.







[단편: 백일천하] fin.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백일천하의 뜀걸음과 같은 역동성이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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