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천하.6

by 최해이


살짝 열어 둔 창가의 몰딩에는 얼음 조각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자동차 배기음이 멀어진다. 미명의 산골 공기는 유독 투명하다. 고요한 승마장의 한가운데에 내렸다. 기사님은 혹시 자신이 태운 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미심쩍어하는 듯했다. 확실히 이 새벽에 승마장이라니. 이상하긴 했다.



맞다. 나는 탈출했다.



휠체어를 끌고 마장 쪽으로 다가가자, 익숙한 내음이 난다. 말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왠지 가을에 태어났을 법한 말의 배설물 냄새다. 다르게 표현하고자 하여도, 이토록 정확한 표현이 없었다. 어휘력 부족. 어릴 때 책은 읽지 않고, 말이나 타고 다닌 결과였다.


커다란 문을 힘주어 열었다. 마장 안은 고요하다. 삐거덕, 거리는 녹슨 문의 소리에 기척이 느껴진다. 이름표를 찾아 움직였다. 루시아. 마하. 해오름. 신시아. 다크호스. 라파엘로. 동키. 운주. 용신사. 천두룡…


그리고 찾았다. 백일천하.


“백일아…!”


활자를 보지 않고서도 찾을 수 있었다. 어릴 적 붙여놓은 진득한 스티커 자국. 일부러 떼어낸 것이 아니라는 듯, 몇몇 스티커는 색이 바랜 채 붙어있다. 내가 걸어 둔 목도리, 꼬질꼬질하게 때 탄 목도리가 물에 잠기듯 흐릿하게 보인다. 나의 잔해들. 어쩌면 영혼의 조각이다. 마방 문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드르륵 소리에도 백일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마방이 푹신한 톱밥으로 깔려 있어서 다행이다. 휠체어에서 내려 다리를 끌고 백일천하 곁으로 갔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되자, 눈을 감고 자고있는 백일이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안녕, 잘 지냈어?”

딱딱한 콧등을 쓰다듬었다. 거친 털이 손바닥의 감각을 살아나게 한다.


“그대로인데, 많이 늙었네”

콧등은 서늘하다.


“나도 그대로인데, 많이 바뀌었어”

눈꺼풀이 천천히 진동하더니 세월에 바랜 회색빛의 동공이 보인다. 콧등의 새까만 털은 새하얗게 바래어 있었고, 코 옆의 억센 수염은 빠지고 없었다. 턱에 짧게 난 흰 털뿐이다. 아끼던 인형에 조금씩 상처가 생기듯, 백일이의 얼굴과 몸 곳곳에 적갈색의 털이 벗겨진 검은 자국이 보였다. 힘겹게 눈을 뜬 백일천하가 손 냄새를 맡는다. 주름 잡힌 코가 야무지게도 들썩인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그 커다란 콧구멍에서 미적지근한 바람이 나온다. 아침에 휴게실에서 몰래 챙긴 각설탕을 까서 입에 쏙 넣어주었다. 우걱, 우그덕. 소리. 백일이의 배에 기대어 본다. 일정한 생명 소리. 따뜻한 체온이 환자복을 통과하여 척추까지 느껴진다. “달리고 싶다.” 사고가 난 이후, 처음이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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