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끝, 미셸 프루스트
종종 불쾌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질투라던지 수치심 그리고 부끄러움. 이걸 보통 정념이라는 것으로 분류하곤 하던데. 도덕적으로 버려야 했던, 사회성 함양을 위해 만들어진 추상의 덩어리.
정체성을 단번에 뒤틀 힘을 갖는다. 가장 원색에 가까운 반응.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임에도 직시할 기회가 거의 없는, 즉시 떨쳐버리고 싶기 때문에 가장 먼저 회피하고 싶은 몸의 반사 반응이다.
말뿐인 격언과 문장이 세상을 떠돈다. 우리는 연고 없는, 철저히 타인이 적어놓은 문장 몇 개 따위로 용기를 얻는다. 도핑이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 부작용을 낳는다. 악순환이다.
애달픈 인간의 삶. 수많은 타인의 물감이 제 몸에 묻은 채, 살갗에 염색된 채 죽게 될 필연적 존재는 어쩌면 정념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세계를 떠날지 모른다. 아아, 무섭다고.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의 내면에 단 한 치도 침투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리라. 물론 맥락이야 다르지만, 장 폴 사르트르가 강조하듯이, 바로 사랑하되 질투심의 대상이 된 “타인은 지옥”일 따름이다. 제 아무리 빼어난 관찰자이더라도 스스로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상대편의 내면을 송두리째 파악할 수는 없다.
_ 해설, 시금석으로서의 소설
’나의 마음-은 진흙탕, 더러운 웅덩이의 바닥에 있지 않나요. 자신을 직시하라는 말은요, 단 하나의 문장, 단 하나의 책, 단 하나의 영상을 본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그렇다 하더라도 착각일 뿐이지 않을까요.‘
쿰쿰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건, 한치도 볼 수 없는 그 웅덩이에 얼굴을 파묻고 심안의 쓰라림을 버티는 과정이 아닐까?
하지만 그때 아가씨는 지금과 똑같은 것을 바라지 않은 겁니다.
어째서?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_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 질투의 끝
타인의 색에 알록달록해진 나의 살갗의 진짜 색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내일의 나-를 종종 상상해 보는 작업로부터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불쾌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수련, 수십 년의 관성으로부터 잠깐 멈춰 섰을 때 발견하는 또 다른 나, 달라진 나.
질투의 끝, 네 점의 단편. 프루스트 대서사의 프리퀄인 이 작품에서 그가 곧 말하게 될 정념의 씨앗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