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오프닝 시퀀스 part 1
지난 강의에서 나는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동시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도 말했다. 하지만 그걸 알려줬다고 해서 당신이 오프닝 시퀀스를 잘 구현해 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당신은 아마도 아하, 그렇구나 하는 선에서 내 다음 강의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러면 분명히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강의가 올라오면, 그것을 즐기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주 뽕을 뽑아서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뼈에 새겨서 잊지 말아야 하고, 영어회화하듯 달달 외워 몸에 육화 시켜서 극본을 집필할 때 자동으로 튀어나오게 해야 한다.
나는 작법을 강의하면서 그 내용을 공식으로 만드는데 신경을 많이 써왔다. 연재하는 글에서 굵은 글씨로 표현되는 것이 대부분 그런 것들이다. 그런 극본 공식을 달달 외우고, 그 공식으로 극본 또는 영상을 보는 훈련을 하면 구조들이 훨씬 잘 보일 것이다. 영문법을 공부하면 영어 구조가 잘 보이듯 말이다.
극본 쓰기에서 작법은 어떤 외국어의 문법과도 같다. 그 외국어에 유창해지면 문법을 공부하고, 예문을 수도 없이 읽고 말해봐야 한다. 이번 강의는 지난 회차 오프닝 시퀀스 강의의 주요 예문과도 같은 성격의 글이다.
보통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지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한 가지가 강조된다.
그리고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의미로.
바로 시작한다.
하우스 오프 카드 공식 포스터
<하우스 오브 카드>는 초기 넷플릭스를 하드 캐리한 정치 드라마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케빈 스페이시를 내세워 연출한 명작 드라마이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 프랭크가 권모술수를 써서 정적을 제거하며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스토리이다.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아 끼익 하는 소리와 개가 깨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를 들은 프랭크가 현관문을 활짝 열고 나오는 것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차는 뺑소니를 쳤고, 옆 집 개는 죽어가고 있다(개는 보이지 않고, 화면 아래 있는 것으로 설정).
프랭크는 화면을 보며 말하기 시작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고통이 있죠. 더욱 강해지게 도와주는 고통과 아프기만 한 쓸데없는 고통이죠. 그런 쓸데없는 것들은 딱 질색이에요. (화면에 보이진 않지만, 개의 목을 조르며)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 나서야죠. 썩 달답지 않은 일에 총대를 멜 사람... (개의 숨이 끊어지고) 이제 됐어요. 이젠 아프지 않아요."
이 한 씬에서 프랭크는 자신이 궂은일을 도맡아서 하는 일종의 해결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런 일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해내는 냉정함과 잔혹함을 갖췄음을 알려준다. 죽이기로 선택하고, 숨통을 끊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다음 씬에서 프랭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씻고, 아내의 드레스 지퍼를 올려주고 신년 파티에 간다. 정치인들이 모인 그 파티에서 프랭크의 말이 이어진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혼자서 소개하다가 말미에 자신을 원내 부총무라고 하고는,
"자잘하고 피곤한 일로 늦어지는 의회를 진행시키는 역할이죠. 막힌 하수구를 뚫고 찌꺼기를 밀어내는 일이랄까요? 하지만 배관공 시절도 이제 끝났습니다. 전 할 만큼 했어요. 줄도 잘 섰고요. 해준 게 있으니 이제 받아야죠. 워싱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첫 씬에서 캐릭터를 보여줬다면 이 씬에서는 그 캐릭터가 구체적인 직업(원내 부총무)을 만나 어떤 일(아마도 더러운 일)을 하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꿈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그 꿈이란 짐작하기에, '궂은일들을 많이 한 것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이렇게 오프닝 시퀀스가 짧고 임팩트 있게 배치돼 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이야기는 프랭크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은커녕 토사구팽을 당하자 깊은 빡침을 느끼고, 자신의 주특기(더러운 일을 눈 깜빡하지 않고 해내는)를 사용해 권력의 중심으로 가는 것이다.
엠파이어 스틸 사진
뮤직 비즈니스의 세계를 다룬 시리즈 <엠파이어>는 단 한 씬으로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가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화면이 열리면 녹음 부스에서 여자 가수가 애절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밖에서는 녹음 관계자들과 제작사 대표인 루시어스가 모니터링을 하는데 맘에 들지 않자 토크백 스위치를 누르고 말한다.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불러. 이게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처럼. 알겠어? 음악으로 네 영혼을 보여줘. 다시 해."
다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는데, 플래시백으로 그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의 얼굴에 슬픈 표정이 흐른다. 그러더니 갑자기 감정이 안 나와서 '안 되겠다'라고 말하며 일어나 녹음 부스로 들어가서 여가수에게 말한다.
"1년 전을 떠올려봐. 총에 맞은 네 동생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기분이 어땠지? 죽은 동생을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
루시어스는 나가면서 '다시 해'라고 하고, 여가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애절하기 그지없다. 결국 녹음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루시어스는 지켜보던 스텝들과 만족스러운 듯이 악수를 한다.
이 드라마 시리즈는 죽음을 앞둔 루시어스가 부르는 마지막 노래와도 같은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포스터
최고의 패션 매거진 '런웨이'에 입사한, 패션과는 거리가 먼 시골뜨기 앤드리아의 생존기인 이 영화는 주인공과 빌런(미란다)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소개한다.
타이틀롤과 함께 시작하는 프롤로그는 뉴욕 아침의 다양한 모습과 패셔니스트들인 여성 뉴요커들의 출근 모습과 패션엔 영 젬병인 주인공이 교차되면서 묘사된다.
프롤로그가 끝나면, 앤드리아가 면접을 보기 위해 '런웨이'에 들어서는 것으로 진정한 오프닝이 시작된다. 제일 먼저 만나는 인물은 앤드리아의 사수가 될 직원 에밀리인데, 이 여직원의 캐릭터도 매우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그녀는 앤드리아가 지원한 자리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자리인지 설명해 준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천진난만한 앤드리아.
에밀리가 황당할 새도 없이, '런웨이'의 편집장이 출근한다는 얘기에 혼비백산해서 편집장 미란다를 맞을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녀만 그러는 게 아니라 회사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고, 게다가 그들은 가급적이면 미란다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보이면 지적사항 외에 좋을 일은 없는 듯). 미란다가 이곳에서 어떤 존재인지가 드러난다.
패션계에서 최고 실력자인 미란다와 패션의 패자도 모르는 앤드리아와의 만남.
"누구지?"
"저는 앤디 삭스라고 합니다. 노스웨스턴대를 갓 졸업했죠.
"여긴 왜 왔지?"
"비서직도 나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실은... 기자가 되고 싶어 뉴욕에 왔는데 여기저기 지원서를 보냈지만 연락 온 게... 솔직히 여기뿐이라서..."
"런웨이 읽어봤어?"
"아뇨."
"지금까지 내 이름은 들어봤나?"
"아뇨."
미란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할말하않'의 상황.
미란다는 됐으니 그만 가보라고 한다. 그대로 돌아서 나가는 앤드리아, 하지만 뒤돌아서 말하기 시작한다.
"맞아요. 전 여기 안 어울려요. 모델처럼 마르지도 않고 패션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어요. 하지만 전 똑똑하고 일도 빨리 배우고..."
그때 누군가 들어와 대화가 끝기고, 앤드리아는 그냥 나오고 만다. 떨어졌다 생각하면서. 그런데 뒤따라 나온 에밀리가 합격했다고 알려주는데서, 캐릭터 시퀀스가 끝난다.
패션업계의 대부와 패션에 대해 1도 모르는 신출내기가 펼쳐나갈 이야기... 궁금하지 않은가.
신입사원 자료 사진
<신입사원>은 에릭(문정혁)이 한창 배우로 잘 나갈 때 찍은 이선미 김기호 작가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오프닝이 재치 있고 유머러스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소개해 본다. 루저인 주인공이 얼결에 대기업에 들어가 최고 사원(?)이 되는 그런 내용이다.
대기업 면접회장에서 드라마가 시작한다. 면접관들 앞에 입사 지원자들이 긴장한 채 앉아있다. 면접관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등장인물에 대해 설명해 보세요."
지원자들 충격을 받는다. 면접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부분 시사 상식을 달달 외우고 온 사람들이라 그런 만화를 본 적이 없을 터. 다들 침묵하고 있는데, 에릭이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까치 오혜성 최엄지 마동탁 손병호 백두산 하국상..."
다들 놀래고, 면접관들도 에릭을 범상치 않은 눈으로 본다.
"다음 질문. 무협지에서 구파일방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릭이 자세한 설명을 하는 동안, 지원자들은 동경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면접관들은 에릭의 지원 서류를 다시 넘겨보며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인재가 하나 걸렸구나.
면접관은 무협 세계에 대한 심화 질문을 하고, 그때마다 에릭은 척척 대답을 해댄다. 면접장은 그야말로 에릭의 독무대이다. 대기업 면접장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틀에 박힌 입사 면접으로는 미래 인재를 제대로 뽑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에릭의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다. 하지만 그에게 마지막 테스트가 남아 있었으니.
"화투 게임 중에 다섯 장으로 하는 도리짓고땡이라는 게 있습니다. 다섯 장의 화투장에서 합이 10이 되거나 20이 되는 족보를 말해 보세요."
이번에도 에릭이 말을 하려는 찰나, 다른 지원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든다. 에릭은 아쉬워한다.
"일일팔, 오오십, 팔팔사..."
하지만 면접관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 족보를 선수용으로 말할 순 없습니까? 그러니까... 전문용어로..."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에릭이 입을 열자, 면접관들과 다른 지원자들이 기대 어린 시선으로 쳐다본다.
"콩콩팔, 꼬꼬장, 팍팍새, 삼파꾸..."
면접관들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하고...
"당신과 같은 인재를 목마르도록 찾았다."
면접관이 감격하고, 다른 지원자들은 괴로워한다. 이에 에릭은 의기양양하는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에릭은 지원자들이 모여있는 면접 대기실에서 졸고 있다. 즉, 이전 씬은 에릭의 꿈이었던 것. 반전이 일어나며, 에릭은 잡기까지 능한 미래 인재가 아니라, 잡기에만 능한 한심한 청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 에릭이 자기 차례가 되자 간신히 잠에서 깨어나 면접실에서 진짜 면접을 보게 된다.
"저는 이 대한기업에 뼈를 묻을 각오로... 저를 뽑아주신다면..."
에릭의 웅변에 면접관들은 물론 지원자들도 아연실색이다. 에릭은 대한기업이 아니라 신성기업에 면접을 보러 왔던 것. 설상가상이다.
다음 씬은 평범한 서민이 집안인 에릭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 장면이다. 엄마는 면접에서 떨어진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며 한탄한다.
"나가 죽어라, 이 웬수야!"
<신입사원>에서 에릭이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허구한 날 만화나 무협지, 그리고 도박이나 하고 있는 한심한 인간, 그런 에릭이 대기업의 전산오류로 입사하게 됐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키리오 포스터
최악의 마약조직 소탕작전에 뛰어든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가 작전 컨설턴트로 참여한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를 만나 펼치는 액션물이다.
캐릭터 시퀀스를 보면 이렇다.
회의실 밖에 케이트를 앉혀 놓고, 회의실에서 간부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아동 납치 전담반을 3년간 이끌었고, 끔찍한 현장에서도 배짱이 대단해. 몸을 사리지도 않아. 이런 놈들 소탕엔 케이트가 적임자야."
"겁 없는 친구군요."
"오늘이 다섯 번째 총격전이었어."
"애송이치곤 괜찮군요. 사무직 경험은요?"
"첫날부터 현장에서 뛰었네."
"맘에 드는군요."
노골적인 설명 씬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케이트가 회의실로 불려 들어온다.
"결혼했나?"
"이혼했습니다."
"아이는?"
"없습니다."
그러자 간부는 그녀에게 마약 카르텔 대응팀에 합류하겠냐고 물어본다.
"단, 지원자만 갈 수 있네."
간부는 선택을 케이트에게 넘긴다. 왜냐, 주인공이 선택을 하는 것이 이야기 전개에게 언제나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늘 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습니까?"
"바로 그놈을 잡으러 가자는 거야."
케이트는 일고의 여지없이 대답한다.
"지원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케이트는 뛰어난 현장 요원이며, 혈혈단신이라 임무에서 죽는다 해도 슬퍼할 가족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 임무를 지원했기 때문에 나중에 무슨 결과가 있더라도 정부는 책임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지원하겠다고 말한다. 그녀의 선택에서 그녀의 캐릭터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렇게 말로만 떠드는 캐릭터 시퀀스로 바로 시작했다면 몰입감이 떨어졌을 것이다. 때문에 이 캐릭터 씬 앞에 임팩트 있는 프롤로그가 배치되어 있다.
마약상의 집을 급습한 케이트의 팀은 그들의 잔혹함에 혀를 내두른다. 수십 명의 사람을 죽여서 벽 속에 넣어 두었던 것. 게다가 창고를 뒤지다가 숨겨둔 폭발물이 폭발하는 바람에 동료 두 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그녀 역시 부상을 입었다.
즉, 그녀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임무에 대한 제안을 수락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먼저 캐릭터 시퀀스를 잘 구상해 놓고,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프롤로그를 구상하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프롤로그가 먼저 나온다고 먼저 구상하면, 자칫 캐릭터가 이상해질 수 있다. 극본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퍼즐을 맞추듯이 쓰는 것이다(내가 스크리브너를 써야 한다고 박박 우기는 이유).
이것이 바로 내가 프롤로그는 옵션이지만, 캐릭터 시퀀스는 디폴트라고 말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