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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Oct 31. 2019

전골을 먹고 감을 나누던 우리의 가을

10월 마지막 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오랜만에 맞이하는 일 없는 아침. 주말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쉬는 날이 찾아왔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기 전 샤워를 하고 하루를 일찍 시작해보았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 하루가 36시간 쯤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이기에, 일찍 일어나 하루가 길어지니 만족도가 높다. 그만큼 일찍 자면 더 좋을텐데 쉽지 않다. 운동, 식사 면에 있어서는 흠잡을 구석 없을 만한 생활을 하지만 수면습관은 썩 좋지 못한 편이다.

 지난 밤 만들어 두었던 우엉 샐러리 조림과 자투리채소로 만든 된장국, 환상적이게 익은 깍두기로 차린 아침식사. 요리를 연구하며 사는 딸이 만든 반찬보다는 수십년간 먹어온 반찬을 좋아하는 듯한 부모님도 우엉 샐러리 조림을 마음에 들어한다. 우엉은 부드럽게, 샐러리는 아삭하게 만들면서도 간을 절묘하게 맞추어야 하기에 쉬운 요리는 아니다. 양성이 과하지 않고, 응축된 몸을 풀어줄 적당한 음성을 살렸기에, 갑자기 추워지는 지금같은 계절, 또는 날이 풀려가는 초봄에 어울릴 반찬이다. 어깨와 목이 결리던 나에게 딱 필요하던 반찬을 만들어 먹으니 밥상에 대한 만족도가 한층 더 높아진다. 이래서 요리를 포기할 수 없다. 

 각종 쿠킹클래스를 마치고 나니 애매한 재료들이 넘쳐난다. 애매하게 남아있던 채소들은 김이 오른 찜기에 찌고, 버섯 파테를 발라 먹었다. 추운 계절이니 막장이나 된장도 어울릴 듯 하다. 애매하게 남아있던 유부에는 잡곡과 연근을 넣어 유부주머니 나베를 만들었다. 몇주전에만 해도 비빔국수를 먹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몸이 전골을 원한다. 입천장이 홀랑 까질 것 같지만, 올라오는 김, 짭짤한 향에 냉큼 입안 한가득 유부주머니를 와앙 베어문다. 

 어릴적, 날이 추워져 갈 무렵이면, 우리집 식탁 한가운데에는 버너가 올라왔다. 그 위에는 아마도 할머니가 해외 여행 중 사오셨을 듯한 전골냄비를 올리고는 온 가족이 고기며 채소를 끓여 먹었다. 할아버지가 ‘샤브샤브’라는 이름의 음식이라고 귀띔해주셨다. 우리 가족은 버너와 국물의 열기에 온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사자성어 같기도, 귀여운 듯도 한 그 음식을 먹었다. 이 날은 부모님과 언니, 나 이렇게 네명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건물에 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우리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부족한 재료는 할머니 댁에서도 조달했기에, 좁은 복도를 여러번 오르내리거나 계단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는 부족한 재료를 알리는 등의 행동으로, 본의 아니게 우리 가족은 온 건물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골을 먹고 있다는 티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를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우리 역시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이 맘때면 저녁 무렵 온 복도는 물론 다른 건물에서도 찌개 냄새나 전골 냄새를 풍기는 이웃이 적지 않았다.

 애매한 쑥갓은 단감, 퀴노아와 버무렸다. 아직 정원이 있는 집들이 있는 우리 동네인 만큼 이 맘때면 단감을 나누어 주시는 이웃 사촌이 있다. 자연 재배로 과일 농사를 짓기란 무척 어렵다 들었는데, 감만큼은 예외가 아닐 듯 싶다. 감나무를 가진 이웃 사촌 중, 심혈을 기울여 정원 관리를 하는 분은 없어보이는데도 매년 감을 나누어주시는 것을 보고 멋대로 짐작해 보았다. 엄청난 정성을 쏟아 키우지 않아도 매년 잘 자라는, 생명력 넘치는 감 덕분에 매년 이웃간의 정은 깊어지고, 까치들도 가장 높은 가지에 달린 감을 먹어가며 우리 동네를 지켜온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우리 동네는 전골 냄새를 풍기고 감을 나누어 가며 살았다.

 아파트나 빌라보다는 정원이 있는 주택이 많던 우리 동네는 차츰 정원보다는 우리 집 같은 빌라가 많아졌다. 하나 둘 재건축을 하더니 이제 우리 골목에 정원이 있는 집은 두 집만이 남았다. 그 중 한집은 우리집 거실에서도 정원이 보이는데, 주인 할아버지께서 평소에도 정원을 아름답게 관리하셔, 할머니할아버지는 종종 지나가는 동네사람에게 정원구경을 하고 가라며 권하시기도 했다.

 몇 달 전, 그 집 앞에 구급차가 와있는 것을 보았고, 며칠뒤 주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주인 할머니는 몇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시기에, 조만간 자녀들의 집에서 함께 지내시고 이 집을 허물 것이라는 소식도 접했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정원 구경을 시켜주시던 분들이 이 곳을 떠나시며, 가을철, 저녁식사 냄새와 정원의 감을 나누던 어린 시절 우리 동네도 이제 나의 기억 속에 잠들 것 같다. 2019년의 가을도 여전히 아름답지만 10년, 20년전 가을의 우리동네는 내 기억에 더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것 같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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