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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Jul 12. 2018

체리 파이.
동화책 속 음식의 현실 속 맛.

처음 느낀 와인의 맛이 동화책에서 읽던 '포도주'의 맛이 아니었던 것처럼

 얼마전 이모가 체리를 한아름 가져다 주셨습니다.

 여름과일 체리를 보니 날이 더워지고 있는게 더 실감나네요. 미국에서 여름을 알리는 과일. 체리.

 공교롭게도 이날부터 온가족이 집에 붙어있지 않을 예정이라 냉장고 속에서 시들해져갈 체리의 어두운 앞날이 예상됐습니다.


 모처럼 얻은 체리를 묵힐 수는 없죠. 베리류 과일을 급하게 처리해야할때는 역시 잼이 제격입니다. 잼을 만들어두면 엄마가 돌아왔을때 파이로 만들어 다같이 먹을수도 있구요.


 어느 동화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릴적 읽던 미국 동화들에는 엄마나 할머니가 파이를 구워주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오븐의 열기로 아늑해진 집안, 향긋하게 퍼지는 달달한 파이 향기. 주인공의 어머니는 주로 체리나 사과로 파이를 만들었습니다. 오븐조차없던 우리집에서는 경험해본 적 없는 풍경이지만, 이 동화 속 장면들은 무척 강하게 각인되었는지, 마치 그 달콤하면서도 구수할것만 같은 음식들을 먹으며 자라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처음 떠난 미국여행에서, 저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미국에서 동화속 음식 체리파이를 처음 먹어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겠죠

 빨갛고 둥근체리 필링이 한 가득 든 파이 한조각. 미국이다보니 심지어 파이 한조각의 사이즈도 컸습니다. 녹진한 시럽으로 반짝이는 체리 필링은 영롱하기까지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음식을 만들어내는지. 우리집에는 왜 그 오븐이라는 신문물이 없는건지 한탄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반짝이는 겉모습에 감동한것도 잠깐.

 포크로 떠먹은 파이 끝자락부터 강하다 못해 아찔한 단 맛에 그 한 접시를 반도 다 비워내지 못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체리파이를 사먹었던 집이 유독 달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한국에서도 미국식 파이를 몇번 시도해 보고, 또다른 미국, 영국 여행중에도 이런 파이를 먹어보았지만 항상 너무 달고 무겁다 라는 감상으로 끝났습니다.


 2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준 동화 속 그 음식을 이제는 입맛에 맞춰 만들어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미국 엄마들이나 만드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어른이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심지어 책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채식주의자’라는 사람이 되어, 파이를 버터와 달걀 없이 만들게 될줄도 몰랐습니다.

 할매입맛으로 자라온 제가 만들었으니 본토의 맛과는 당연히 다릅니다. 지금까지 먹어온 미국식 체리파이에 비교하면 훨씬 덜 달고 가볍죠. 미국 어린이가 먹어보면 어릴적 제가 느꼈던 것 같은 충격을 반대로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에서 먹었던 체리 파이는 제가 망상으로 그려온 동화책 속 그 맛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은 있지 않을까요. 망상속 음식의 맛이 망상과 너무 달랐던 기억. 처음 마셔본 와인의 맛이, 어릴적 책에서 보고 상상하던 ‘포도주’의 맛이 아니었던 것처럼요. 동화책 속 음식의 현실 속 맛은 동심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커가는것 같기도 합니다.


편한 일상사진은 인스타그램에

비건,마크로비오틱 푸드 레시피와 조각글은 블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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