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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Jul 26. 2021

어느 배달 중독자의 고백

배달의 기쁨과 슬픔



‘문 앞에 두고 갑니다.’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덩그러니 놓여 있는 커피를 마주했다. 얼른 집어 집안으로 들어온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마셨다. ‘으으, 시원해…’ 오늘의 첫 커피 수혈이었다. 젖먹이 아이를 두고 커피 한잔 사러 가기도 어려운 시절, 커피 배달은 나의 구원이었다. 아메리카노를 한나절 만에 들이키니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이 다 되었다.





나는 음식 배달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역마다 배포되는 배달책자를 뒤적이며 신중하게 메뉴를 골랐다가도 막상 음식 배달을 시키지 않은 적도 많았다. 전화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신호 대기음을 들으며 긴장했고, 실수하지 않도록 메뉴와 수량을 되뇌었다.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틀리지 않도록 또박또박 다 말하고 나면 진이 빠졌다.     


그러 어느 날 ‘배달 주문 앱’이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일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음식 배달 주문에서 나를 막아서던 허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먹고 싶은 메뉴를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하기까지 손가락이 거침없이 움직다. 나의 집중 육아 기간과 배달 앱의 흥행이 맞물리면서 몇 달 연속으로 배달 앱 VIP를 찍다. 음식 배달로 끼니를 연명 시기였. 더불 집에서 편안히 즐길 수 있는 디저트야말로 배달의 꽃이요, 기쁨이었다. 우리 집은 바야흐로 1일 1배달, 혹은 1일 2배달 시대를 맞고 있었다.     


이어지는 코로나 19와 언택트 소비의 영향으로 계속 황금기를 구가하던 배달의 시대. 시대를 든든히 떠받치던 성실한 호구였던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이제 이 시대가 저물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말이다. 배달의 편리함과 간편함에 도취되었던 나는 그 이면을 간과하고 있었다.     


“헉! 카드 값이 왜 이래? 나 쓴 거 없는데.”     


불어난 카드 값에 화들짝 놀라 내역을 살펴보면 ‘네가 쓴 거 맞아’라고 적혀 있다. 우아한자매들, 저기요, 지시장… 다채로운 배달의 향연들과 쓰디쓴 지출액의 흔적이 증거다. ‘배달료’와 ‘최소 주문 금액’이라는 옵션들은 지출액의 덩치를 부풀다. 나의 구원이기도 한 라이더이지만 엄연히 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 역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금액을 채워야만 하기에 먹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장바구니에 꽉꽉 채운다. 가령 커피를 주문한다면 조각 케이크를 끼워 넣는 식이다.     



쓴 게 없긴. 안녕?



돈도 돈이지만, 냉장고를 열면 나중을 기약하며 썩어가는 배달 음식들이 보였다. 게다가 분리수거함에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플라스틱 포장재들이 꾸역꾸역 쌓여 있었다. 소비의 풍요로움 속에서 흥청망청 지구를 썩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제로 웨이스트까지는  못할망정 역행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문득 너무너무 부끄러워졌다.     


더불어 라이더에 대한 사회적 이슈도 끊이지 않는다.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처우나 위험 보상에 관한 문제도 여전히 논의 중인 상황이다. 물론 라이더의 생업을 보장해주는 것도 고려해야 하지만, 더 이상 생명을 담보로 한 배달이 공공연히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봄, 배달 주문을 하고 나서 예보 없이 몰아쳤던 눈보라에 급하게 다시 가게에 취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라이더가 출발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안전하게 도착했지만, 기다리는 내내 발을 동동 구르며 미안해하던 기억이 난다. 한 조각의 편리함을 보장받기 위해 누군가의 위험을 담보로 잡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배달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지만, 기쁨은 잠시인 반면 슬픔의 대가는 크다. 미세먼지 때문에 집에 갇혀서 뛰어놀지 못하는 아이의 슬픔, 쓰레기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죽는 동물의 슬픔, 그 물에서 자라난 각종 고기와 채소를 먹고 병들어 가는 우리 모두의 슬픔. 그 외에도 궂은 날씨에도 배달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라이더의 슬픔 있다.  

    




배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을까? 가부를 떠나서, 사실 누군가에게는 바람직한 대안이 아닐 수 있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배달을 통한 한 끼는 소중한 것일 수 있기에. 또한 코로나 19로 인해 매출이 삭감된 사업주들에게 배달은 생명줄과도 같다. 생업으로 배달을 하는 라이더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도한 포장재가 문제라면, '음식이 조금 섞여도 좋으니 같이 포장할 수 있는 것들은 같이 해달라'라고 메모를 남기 것은 어떨까. 두 잔의 커피를 시키기보다는 한 잔의 커피를 사이즈업 해서 컵을 하나로 줄일 수도 있겠다. 꼭 필요한 만큼만 주문하는 습관도 필요하다. 그리고 라이더에게는 메모를 남기자. ‘조금 늦어도 좋으니 천천히, 안전히 와주세요.’


사업주, 소비자,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배달을 통해 행복했으면 좋겠다. 또 그 행복을 동력으로 각자가 지속 가능한 배달의 해을 찾아갔으면. 배달의 슬픔은 줄이고 기쁨만 누릴 수 있는 법을 뒤늦게 고민하는 어느 배달 중독자의 고백이었다.




* 매일 글쓰기는 주말에는 쉬어가려 합니다. 육아 강도가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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