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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규 PHILIP Jun 14. 2020

[삼삼한] 기말고사

Creative by André Derain(1880-1954)

앙드레 드랭. 1906. the two barges, les deux peniches. Centre Pompidou, Paris, France.




두툼한 메모지 한 권을 후배에게 받은 일이 있다. 메모지 마지막 장에 ‘포기하지 마! 습관이 되니까’라고 썼다. 다이어리 등을 선물 받으면 이 같은 명담(名談)을 종종 쓰곤 한다. 이전에는 ‘좌절하지 않겠습니다’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바꾼 것은 아니고, 글귀에 꽂혔다고 할까. 여하튼 메모지 뒷장에 써 둔 글을 다시 읽는 일은 좀처럼 없다. 메모지 한 권을 촘촘하게 다 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논문 통계 과목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 노트북과 참고 자료를 챙기면서 선물 받은 메모지도 함께 챙겼다. 노란색이 내게 행운을 폭격해 줄 것 같아서다. 요행을 바라지는 않지만, ‘관용 없이 F학점도 때린다’라는 소식에 ‘패스’만 하게 해 주십 사하는 마음이 노란색 메모지를 부적으로 삼은 것이다.


시험 시간은 총 8시간이고, 논문에 쓸 4개 항목 통계 결과를 제출하는 것이다. 데이터 코딩을 순조롭게 마치고 첫 번째 통계 처리 중 노트북이 멈췄다.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재부팅 후 프로그램을 켰는데 다시 멈췄다. ‘데이터~ 데이터~’만을 중얼중얼. 리셋 또 리셋을 하면서 한 시간을 까먹었다. N 교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보다 더 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이 쓰던 노트북을 내게 준다.


네 시간쯤 남았다. 피치를 올리면 가까스로 제출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N 교수 노트북은 너무 느리다. 이런 처리 속도라면 여덟 시간도 모자랄 판이다. N 교수 노트북을 반납하고, N 교수의 지도 학생 노트북을 빌릴 수 있었다. 천만다행! 하지만 시간 안에 보고서를 끝낼 수 있을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한 치 오차가 없어야 한다. 실수는 곧 F학점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근육이 팽팽해졌다.


통계 수치를 메모지에 옮겨 적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급기야 메모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리나케 메모지를 집어 올리는 중에 낯익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 ‘포기하지 마! 습관이 되니까’ 누가 한 말이었을까. 지금 이 순간 이 말만큼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갖게끔 격려하는 말이 또 있을까. 이 참담함을 말끔히 씻어주는 한 마디다. 웃음이 절로 났다. 포기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하니 초능력이 생긴다.


두어 시간이 남았다. 무난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렇게 끝나면 기말고사 에피소드는 메모의 힘을 칭송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 종료 40여 분을 남기고 빌린 노트북마저 멈췄다. 재부팅조차 안된다. 강제 종료도 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멈췄다. 모든 것이 사라진 지구 별에 재깍재깍 시계 소리가 공포처럼 느껴본 이가 있을까. 종말은 이런 느낌일 거다.


식은땀이라도 났다면 스릴감 어쩌고 했을 텐데, 말라비틀어진 고목에 혹시 남아 있을 한 방울 물기라도 싹 훑어가겠다는 바늘이 내게 꽂힌 듯했다. 시험은 그대로 종료됐다. 사정 얘기를 들은 N 교수는 잘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메모장에 써 둔 글귀로 한고비는 슬기롭게 넘겼다. 잘한 일이다. 이제 노란색 메모지를 부적 삼은 효험을 기다리고 있다.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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