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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한엄마 Oct 31. 2022

#6. 모순에 대하여

철학으로 새로'변'해 '태'어나는 40대 아줌마 이야기

들어가며


마흔에 들어선 중년 아줌마. 이제 서서히 내 시대와 철학자의 시대가 만나고 있다. 내가 태어난 20세기. 이제 만날 철학자들은 그 전 1800년대를 살다 갔다. 이들의 삶과 그들의 철학적 사유를 비교해 보면 굉장히 모순된 점이 많다. 내 삶에 비춰보니 현실과 이상은 모순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모순을 알고 심한 방황을 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을 갖기 위해 본인 신앙을 어겼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시간을 죄책감으로 자식들을 못살게 굴었다. 마르크스는 돈은 죄악이고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정작 그는 자본가 친구 엥겔스의 도움으로 그 이론을 설파할 수 있었다. 그는 상속 금지를 주장했다. 웃기게도 그는 부모의 유산으로 그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된다. 니체는 어떤 자세로 미래를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문학적인 방식으로 주장했다. 듀이는 대학 교육이라는 방식을 통해 인간의 길을 제대로 판 인물이다. 니체의 사상은 너무 앞서 나갔고 듀이의 대학 교육 방식은 전통적이고 오래된 듯했지만 얼마 안 됐다. 그 대학 교육은 지금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시작됐다.    


1.


나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방송통신대학 유아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만큼 내가 결혼 후 자녀를 적극적으로 원했다. 그때 자주 나온 학자는 듀이였다. 듀이가 대학 안에서 내놓은 철학들이 유아교육에 매우 많이 적용되어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나왔던 정규적인 확신에 찬 교육 툴이었다. 듀이가 미국이라는 신생 나라의 신생 교육 체계인 대학 안에서 성실한 교수이긴 했다. 그 당시 나 또한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에 대해 많이 공부해 나갔었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가? 내가 원하는 임신과 육아조차도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2.


원래 내 사주에는 자녀가 없다. 자녀를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건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인생에서 갖지 못할 수도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을까 싶다. 스물일곱. 취업을 준비하다 나는 결혼을 선택했다. 키에르 케고르는 독실한 기독교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다. 자식들에게 비이성적인 종교 독실함을 강요했으나 정작 자신은 규율을 어겼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의 방황이 시작된다. 그의 좌절같이 나 또한 비슷한 절망에 빠졌다. 나는 결혼 후 바로 자녀를 낳은 다음 경제활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몇 년을 기다려도 임신이 되지 않아 병원을 찾아갔다. 그 원인은 사주와 달랐다. 도대체 왜 이럴까, 신에 대한 원망은 키에르 케고르가 절망 후 자포자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던 시기였다.


 3.


 그래도 임신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 있었다. 먼저 내 배란 주기를 병원에 가서 관찰하고 날짜를 받았다. 당연히 임신이 안 되니 난포 주사를 배에 맞았다. 그러면 한 달에 한 개 이상의 난포가 터져 많은 난소가 나온다. 그다음 인공수정을 진행했다. 임신만을 바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정을 해야 했다. 돈이 인간미를 없앤다며 자본에 반대했던 마르크스. 정작 그는 그 주장을 위해 부자 자본가 앵겔스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그가 빈곤에 탈출해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때는 부모의 유산을 받고 나서인데 그는 상속을 반대했다. 나 또한 임신 소식을 받은 후에 결정해야 했던 건 임신 유지가 아니었다. 선택 임신 중단에 관한 결정이었다. 아기집이 세 개가 보였다. 세 쌍둥이. 산모에게 위험이 예상되어 8주 안에 한 아이를 중절할 수 있었다. 원한 건 임신이었으나 결정은 중절이라니! 이 모순된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4.


 한꺼번에 아이를 셋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 중절을 결심했다. 나는 생명을 죽이는 건 나쁜 일이라고 절대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결정의 갈림길에서 나는 내 그 생각을 꺾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니체의 초인 정신이 내면을 대신 얘기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초인에게 선(아이 셋을 유지)과 악(선택 임신 중지)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동물과 초인(미래 자녀) 사이고 내 역사는 미래 자녀인 초인 탄생을 향한 역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나는 아직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후회하지 않는 마음에 죄책감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을 니체가 제거해 준 느낌이었다.


나가며


 우리가 철학을 배우는 이유는 그저 잘난 척하기 위한 게 아니다. 철학을 통해 내 삶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번 1800년대 철학자들의 주장은 그들의 삶과 이론을 같이 얘기하기에 스스로 의문점이 많이 들었다. 그 의문점은 비단 본인뿐 아니라 지금 참고하고 있는 책,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을 쓴 저자 안광복 님 어조에서도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계속 철학이 계속 발전되어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그 모순과 차이가 해결할 수 있는 명쾌한 철학을 향해 가고 있는 길목이 아닐지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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