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Oct 30. 2022

동전 세 개의 첫사랑

<사랑을 사유하다> 5화

100원짜리 동전 한 닢이면 부끄럽지 않게 커피를 마시던 때가 있었다. 27년 전 봄, 인천의 00전문대 00통신과 사무실 입구 커피 자판기 근처에 나의 첫사랑이 있다.  



“안녕, 유연이구나. 커피 한잔해. 정아도 있었네”라며 그는 동전 세 개를 자판기에 떨어뜨린다. '윙'하는 기계음이 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종이컵 배출구를 향해 그는 고개를 숙인다. 그의 긴 앞머리는 수줍은 듯 내려고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묵직한 리듬으로 앞머리에 가르마를 만든다. 그는 사슴처럼 짙은 쌍꺼풀을 감았다가 뜨며 외로움이 담긴 커피 한잔을 나에게 전한다. 내 친구 정아에게는 의미 없는 무표정이 담긴 한잔을 준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샤프하게 만들어 주는 긴 앞머리의 가르마와 구레나룻에 반했다. 부드러움과 터프함을 갖춘 오롯한 인간인 그에게, 완벽하지 않은 내가 먼저 고백하는 건 당연지사다. 우리는 그렇게 캠퍼스 커플이 되었지만, 슬프게도 몇 달 후 그는 군대에 갔다.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그리움을 종이에 담으면 더 이상 그립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고 돌아,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모든 연인의 기념일인 그날, 나는 방구석을 지켰고 정아는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정아는 짬을 내서 나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 위로해 주었다. 


“그래도 영성오빠한테 어제 전화 왔었지? 나한테도 전화했었어. 친구들이 많이 그립데”


정아의 전화는 위로가 아닌 염장을 주었다. 1995년, 공중전화가 귀했던 군대의 크리스마스이브 날 그는 내가 아닌 그녀에게 전화한 것이다. 4개월 후 첫 휴가를 나온 그는 그 전화 사건에 대한 산뜻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나와 크게 다투었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그만 집에 갈래” 

“유연아 미안해,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뛰었다. 멀리서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정아가 좋아”  


일곱 글자의 짧은 문장이 내 귀에는 너무나 길게 들렸다. 그렇게 그는 군화를 거꾸로 신었고 나는 그를 저주했다. 무한 반복되는 일곱 글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들리지 않게 되었다. 


새 학년 과대표로 뽑힌 그 다른 남자는 짧은 머리를 한 따끈따끈한 복학생이었다. 물론, 손가락으로 묵직하게 넘길 앞머리 따윈 없었으며, 굵은 손가락으로 왕진 가방처럼 보이는 보스턴백을 들고 다녔다. ‘무대포’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 촌스러운 아저씨가 모든 연인의 기념일인 크리스마스에 나에게 카드를 주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사랑의 하트를 들고 튀어나오는 팝업 카드 아래에는 알다가도 모를 문장으로 시작되는 고백이 담겨 있었다.

‘언제나 너는 내 마음속에 있으며 순간에서 영원까지 숨을 쉰다~~’



그는 강의실 문을 발로 차고 다니고, 선배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나에게 반전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그 후로 징그럽게도 그와 나는 연애 4년, 결혼생활 23년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 나에게 더 이상 반전 매력이 없듯이, 남편에게도 더 이상 첫사랑의 치유 따위를 받을 게 없다. 더불어 첫사랑의 기억도 희미하다. 


그러나 철학을 통해 사랑을 사유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나는 첫사랑을 곱씹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첫사랑, 그가 준비한 동전 세 개는 처음부터 정아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고 나의 착각이 스무 살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리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했다.


“안녕, 정아 왔구나. 커피 한잔 해. 유연이도 있었네”

“안녕, 유연이구나. 커피 한잔 해. 정아도 있었네”

라고 듣고, 그렇게 보이게…


그럼에도 나는 착각한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사건의 중심에 서서 피해자 코스프레했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의 첫사랑은 그저 착각이고, 시작도 못 하고 끝난 실패인가. 


재작년,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서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 헤매었다. 깔끔하고 젠틀한 포마드 스타일은 왁스를 덕지덕지 바르느라 손바닥이 끈적대는 느낌이 싫었다. 캐주얼하고 남성미가 물씬한 투블럭은 여자 화장실에서 비명을 몇 번 듣고서 포기했다. 촉촉하게 정돈된 슬릭스타일은 얼굴이 큰 나와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안주한 지금의 스타일은 내 첫사랑의 스타일이다. 27년 전 그의 머리는 선풍기로 말려 정돈한 자연산이겠지만, 2022년 나는 가르마는 풍성하게, 구레나룻과 목덜미는 깔끔하게 보이기 위한 파마를 해야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페르소나가 첫사랑과 묘하게 닮았다는 건 내 안의 아니무스, 아니마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끌고 온 건 아닐까. 그렇게라도 첫사랑을 이루고 싶었던 건가. 부드러움과 터프함을 모두 갖춘 그를 끌어 내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 여성성인 아니마를 채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의식적으로 만나 서로의 실체를 사랑하지는 못했으나, 내 안에서 어쩌면 그 첫사랑은 이미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보 미안, 이런 건 글쓰기를 위한 사유인 거 알지?







다음 주 일요일 오전 11시

<사랑을 사유하다> 5화로 이어집니다.



총 8화로 구성 예정인 <사랑을 사유하다> 시리즈는 처음부터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사랑을 사유하다> 1화-지적 사기 전과 1범이 되다

https://brunch.co.kr/@youyeons/26

<사랑을 사유하다> 2화- 사랑의 시작, 나를 아는 것부터~

https://brunch.co.kr/@youyeons/28

<사랑을 사유하다> 3화- 술잔에 비친 나를 사랑한다

https://brunch.co.kr/@youyeons/29

<사랑을 사유하다> 4화- 결핍은 사랑을 싣고~

https://brunch.co.kr/@youyeons/30


매거진의 이전글 '나 여기 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