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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Dec 24. 2023

일상에 침투된 덕질력


 

중·고등학교 때는 돈이 없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내가 부모님에게 용돈 타는 입장에서 돈이 없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덕질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경제적 능력을 갖춰야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당시 한 달 용돈이 이만 원이었던 내가 CD를 구매한다는 건 엄청난 결심을 갖고 지르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인터넷에서는 불법 다운로드가 유행을 했지만, 우리 오빠들의 노래를 어디 감히 불법 다운로드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처음으로 음반점에 가서 god CD를 구매했다. 우리 오빠들 CD가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히 다루는 것은 물론, ‘보통날’이 타이틀곡인 6집 앨범은 종이 케이스가 있어서 때가 타는 게 걱정되어 북 커버 비닐로 CD를 감싸는 정성까지 보였다. 그 정도로 god 앨범은 내게 보물이었다. 



사실, 나는 CD 플레이어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노래를 듣지 못하고, 집에 가서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큰 오디오 기계로 음악을 듣고는 했다. 그 당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음악방송에 god가 나오면 “오빠!!”를 외치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음악방송을 하는 요일만 꼬박 기다리고는 했다. 


그러다, 우리의 데니오빠가 키스 더 라디오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창기 데키라(데니의 키스 더 라디오 줄임말) 팬이었던 나는 늘 라디오와 함께 했다.

드라마 덕후였던 내가 라디오라는 매체 자체를 제대로 처음 접하게 된 것 또한 god의 영향력이었다. 라디오는 그저, 수학여행 버스를 타거나 부모님 차를 탔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과 교통정보만 나오는 걸로 생각했는데, 우리 오빠가 진행하는 라디오는 항상 애청자들과 함께 했고, 문자도 보내서 사연이 읽히거나 신청곡이 틀어지면 그 다음날은 마치 내가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장군처럼 친구들에게 나의 썰을 풀어주고, 점심시간이 되면 컴퓨터실로 달려가 라디오 다시 듣기로 나의 사연을 들려주며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는 했다. 

독서실에서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KBS 89.1을 맞춰놓고 데니의 키스 더 라디오를 들을 때면 남들은 알지 못하지만,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오빠와 나, 그리고 청취자들만의 애틋함과 끈끈한 연대가 있었다.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들의 이름이 친근해지고, 재밌는 사연이 나오면 웃음이 밖으로 새어 나올까 허벅지를 누르며 꾹 참기도 하고, 슬픈 사연이 소개되면 함께 울며 모든 일이 잘 해결되기를 기원하고는 했다. 라디오는 참 신기한 매체라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라디오를 빼고 일반적인 라디오는 얼굴이 나오지 않는데, 목소리 하나만으로 이렇게 설레고 좋아하는 걸 보면 마치.. 연애 초반에 좋아하는 상대와 목소리로 밤새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다. 


누군가는 아이돌, 가수, 연예인을 좋아하는 걸 한심하게 생각하며 좋아한다고 해서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연예인을 좋아했을 뿐인데, 사연이 소개되어 마스크팩부터 김까지 경품을 받고는 했다. 그것도 대용량으로..!!! 

그때 내가 경품을 받은 횟수를 세어보면, 그때 글쓰기 실력이 발현된 게 틀림없다. 

만약, 중·고등학교 때 라디오가 없었으면 나는 그때를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매일 밤 데니의 키스 더 라디오 오프닝 곡이 흘러나오는 그때가 되면 오늘 하루 힘들었던 건 다 사라지고, 오빠의 목소리와 사연, 노래에 빠져들고는 했다. 지금은 매체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짧고 자극적인 영상들이 주목을 받느라 라디오의 추억이 많이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라디오에 향수가 있다. 

그때 그 시절 우리 오빠를 생각한 것처럼, 라디오는 마치,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 담긴 앨범처럼 내게 존재하고 있다. 이런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축복받은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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