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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이 Aug 11. 2024

스윙바이



 지금보다 어릴 때 알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아직도 달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한동안은 달 사진을 갤러리에 엄청 모았더니 친구들도 어디 있든 자신이 보고 있는 달을 찍어 보내주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달이 보이면 저게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에게 묻는데, 상현달인지 하현달인지 곧바로 말해주면 진짜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어디에선가 어떤 일본 작가가 "당신을 사랑해요."를 "이 참 밝네요."라고 번역했다는 글을 읽고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천체에 낭만적 포장을 입혀 생각하기도 했다. 생김새도 둥그러니 귀엽다. 무튼 달은 좋다. 최근에는 달이 내가 아는 하늘을 벗어났을 때 나오는 가장 가까운 존재, 우주로 이어지는 통로 같아 보인다 생각을 하게 됐다.


 타고나길 상당히 형이상학적 사고를 가진 어린이였는지 '우주 비행사가 되어서 언젠가 우주로 가봐야지.' 보다는 주로 '우주란 무엇일까' 류의 공상을 (했)한다.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자꾸 떠오르는 게 생각이 많은 사람의 특징인데, 그런 사람은 우주를 떠올리며 무궁무진한 생각거리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우주를 소재로 한 영화를 좋아하고 다큐멘터리도 보고 또 보게 된다. 알 수 없고 갈 수 없는 우주지만 그와 관련해 하나라도 알게 되면 그야말로 '알게 된 것' 자체로 기쁨이 느껴진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


 얼마 전에는 1977년에 우주로 나가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탐사한 보이저 2호가 태양계 바깥으로 사라졌다는 내용의 영상을 봤다. 멋지다 보이저 2호야!(짝짝) 지구에서 출발한 것들 중 가장 먼 우주까지 가 본(가고 있는) 존재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기특하기도 했지만 제일 흥미로운 내용은 지구에서 싣고 간 연료를 다 쓴 보이저 2호가 태양계 바깥으로 뻗어나갈 에너지를 얻은 방법이었다. 지구의 똑똑한 과학자들은 보이저 2호가 행성의 근처를 지나갈 때 그 행성의 중력을 도움 삼아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 비행경로를 만들었다. 일명 스윙바이.


 보이저 2호는 목성을 지날 때 목성이 가진 중력의 도움을 받아 토성 근처로, 토성의 곁을 지날 때는 토성이 가진 중력을 이용해 더 먼 천왕성으로 비행할 속도를 얻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연료가 없어도 궤도를 바꿀 수 있고 때론 속력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멀리 있는 행성을 탐사할 때 스윙바이는 불가결한 것이라고 한다. 우주탐사는 내 과제니 내가 모든 걸 자급자족하는 게 아니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천체에게 추진력을 조달받아 내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행성들이 특별히 나를 위해 준비할 것도, 내어줄 것도 없다. 그저 평소그 자리에 있으면 힘이 필요한 존재가 근처를 지나며 힘을 얻는다.


 우리에게도 각자 스윙바이할 천체가 필요하다. 삶을 유영하다 연료 탱크에 남은 게 거의 없다고 느낄 때,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공간에서 주유를 하겠지만 때로는 그 주유소에도 더 끌어올릴 연료가 없을 수도 있다. 모든 게 다 망했고 답도 없고 길도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늘 그 자리에 그냥 있어서 망한 상태 그대로라도 곁으로 갈 수 있는 행성. 힘을 얻으러 가는게 그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괜찮아질 때가 있다. 상대가 뭘 해주지 않아도 나는 그가 가진 중력으로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연료 탱크에 남은 게 없어도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다시 다른 경로를 만들어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 정 힘들다면 그냥 그 중력에 끌려들어가 잠시 착륙해 쉬어도 좋을 것이다. 어떤 날에는 위로가 되고, 어떤 날에는 응원이 되겠지.


 당신의 우주에는 몇 개의 천체가 있는가? 우리가 가진 각자의 세계가 하나의 우주라면 우리는 끝없이 우주를 유영한다. (탐사도 하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떠다닐 때도 있음) 그 우주에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별과 달과 행성이, 각자 저마다의 중력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어주면 좋겠다. 우리가 언제든 스윙바이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나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런 중력을 가진 천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나저나 우주를 이토록 좋아하는데도 지금까지 누구도 나에게 '별 보러 가자'라고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별이나 달을 따다 준다고 했던 사람도 없다. 감이구만.. 뭐가 됐든 따서 나에게 가져다줄 필요는 없고, 그저 우주에 중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 준다면 좋겠다.




내일은 되겠지 오늘은, 일단 스윙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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