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아무래도 이 문장은 내 분노 버튼인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런 말이 몇 마디쯤 있다. 그냥 흘러가는 말들 사이에서 상대가 내 손에 쥐어준 것처럼 오래 남는 말. 좋든 나쁘든.
처음 저 말이 남게 된 건 대학교 4학년때로 기억한다. 그때 만났던 사람은 대기업 인턴을 하며 갓 명함을 팠었는데 어느 주말 내가 방송을 하고 싶다고 하자 저렇게 말했었다. 나는 실망했다. 그의 의도는 걱정이 담긴 응원이었을까, 현실적인 지지를 위한 조언이었을까? 그 의도는 모르는 채 나는 아주 단정적으로 실망했다. 물론 그런 감정은 삼켜졌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내가 알아서 잘해볼게.'였다. 그 뒤에 그가 무슨 말들을 덧붙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몇 년 뒤 내가 일하던 방송국 근처에서 만나게 됐을 때 그 사람은 '잘할 줄 알았어.'라는, 오랜만에 마주친 사람이 으레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로 기억된다.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그의 방식으로 내게 닥친 문제의 해결을 응원하고 지지해 줄 것이다. 사기를 북돋우는 멘탈 치어리더, 한탄을 들어주는 대나무숲,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주는 정보원, 길을 제시해 주는 멘토링,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서포트. 어릴 때는 어떤 방식의 응원과 지지는 달게 기꺼이 받으면서, 내가 내키지 않는 방법으로 관심과 지지를 주면 싫어했던 것도 같다. 내게 필요한 게 뭔지 모르면서 필요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지금은 그게 어떤 종류든 응원을 받는 입장에서는 그 호의 자체로 고맙고 힘이 된다.
그런데도 아직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가 분노버튼인 이유는 그가 호의를 기반으로 말했대도 그 말을 듣고서는 당분간 링 위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적어도 내겐 지연버튼으로 작동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도 모르고 중요한 걸 내걸거나 뛰어드는 철없음, 어려운 줄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부주의함, 무모함, 자기 객관화, 재검토, 재정비, 다시, 다시. 이 말에 귀 기울이려면 일단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그래서 그 말은 오래 머물며 굳이 더 먹을 필요가 없는 겁을 더 먹인다.
좋은 걸 줄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여겨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는 잘 받을 줄도 알아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응원과 지지의 마음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게 되려고 노력해야지. 그러기 위해서 어떤 말은 걸러 듣는 흐린 귀 시스템이 있어야 할 때도 있다. 이미 들린 이상 노이즈 캔슬링 처리가 안 되는 분노버튼이 있다면 최대한 빠르게 그 말을 흘려 내보내는 방안을 구축하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네 편이야! 나의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반대로 내가 상대를 응원할 때 그에게 내 마음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해 본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 요리조리 생각해 봐야지. 말이 필요하다면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고를 것이다. 분노버튼이 눌릴 만큼 힘든 말을 들으면 오래 귀가 괴로울 수도, 힘이 되는 말이 남으면 오래 마르지 않는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말은 오래 남아 뿌리를 내리기도 하니까.
내일은 되겠지 오늘은, 일단 말 고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