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오늘의 신청곡 : 그때 우리가
그때 우리가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처음 그날부터 알고 있었다면
곡 강아솔 / 작사, 작곡 권영찬, 강아솔
시간이 지나야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카스테라.
현대문학비평 첫 수업에서 만난 박민규 작가의 소설 <카스테라>의 비평문. 교수님이 한 단락씩 낭독하는데 들어도, 읽어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소설을 미리 읽고 들어간 수업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채 어렴풋이 느꼈던 비평문은 엄하고 심오했다. 시대와 상황, 인물의 말과 행동에 촘촘하게 부여되는 의미가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수강정정기간에 강의를 포기하고 싶었는데 같은 시간에 들을 수 있는 전공과목이 없었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문학비평수업을 들으면서 몹시 괴로웠다. 주로 어려운 한자단어가 들어간 긴 문장을 해석하느라 바빴고, 읽으면서도 전 문장과 다음 문장이 연결이 안 돼서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였다. 어쩌다 내용을 이해하면, '아니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이었다고? 이렇게 읽힐 수 있다고?' 하며 뜨악했다. 한없이 얕은 독해력과 사고력에 매번 새롭게 놀랐다.
읽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에 대한 감상을 밝힐 수가 있을까. 과제도 시험도 될 대로 돼라 싶었다. 뭘 알고 감상을 했어야 감상문을 쓰지... 복수전공을 하며 거의 유일하게 후회를 한 수업이었다. 왜 하지도 못할 걸 한다고 나서서 학점만 깎고 있을까. 이런 게 바로 삽질이구나. 그런데 학기 끝에 받았던 학점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양호했다. 혹시 다른 학생의 채점표가 잘못 입력된 것은 아닐까? 굉장히 의아했지만 교수님께 찾아가지는 않았다. 소 뒷걸음질 치다 잡은 쥐 절대 지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으면서 독해력이 좋아졌나? 알고 보니 내게 신이 내린 글 빨이 있었나? 비평을 할 수 있는 사고력이 4개월 만에 길러질 수가 있나? 그때의 나는 내가 어디까지 이해하는지도 뭘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출한 시험지에 써서 낸 내용도 기억이 안 났다. 높게 나온 학점이 사실 실수였을까봐 교수님께 묻지도 못했다. 정말 채점지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에 문득 생각이 나서 카스테라를 다시 읽었다. 고장 난 냉장고에 아버지도 넣고, 미국도 넣고 되는대로 이것저것 넣는다. 분명 10여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이게 뭐야' 싶었는데, 다시 읽은 카스테라는 갑갑하고 슬펐다. 그때는 왜 소설의 제목이 '냉장고'이거나 그와 연관된 단어가 아니고 '카스테라'일까 궁금했는데 다시 만난 제목은 아주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렇게 달라진 감상은 내가 이미 이 소설을 읽어봤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소설에 대한 비평문을 혹독한 노력으로 읽어냈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냥 조금 더 살았기 때문일까, 그동안 책을 더 많이 읽었기 때문일까, 그 모든 이유 때문일까. 그때 읽었던 책들이 다르게 읽힐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 미웠던 인물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 그 문장과 대사가 새롭게 가슴에 박힐 때. 이유는 몰라도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느낀다. 지금 이해하는 만큼을 그때의 내가 이해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 다르게 살게 되었을까?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때 친구는 벌써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었다.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는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같이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와서 각자 바나나 우유를 하나씩 물고 유유히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게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들고 싶은 장면이라고 했다. 최대한 예쁘게 차려입고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걸 먹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목욕하고 나오면 얼굴도 맨얼굴이고 머리도 부스스할 텐데. 그땐 이해가 안 됐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다고 한 건 한 번의 멋진 데이트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이었던 것 같다. 너무 평범해서 하루이틀 뒤에는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매일. 그걸 같이 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할 줄 알다니.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야 이해하게 되는 걸 또 누군가는 원래 알고 있기도 한 모양이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친구 말에 주억거린다.
시간이 흘렀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있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과 이해하는 것은 같은 상태일까? 받아들이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본다. 그때 우리가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그 어디든 함께 도착할 수 있었을까. 이제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