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신청곡: 지금이 우리의 전부
그때가 좋았지
나중에 우리 지난 얘기 하지 말고
지금 얘기해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곡 안녕하신가영 / 작곡 작사 안녕하신가영
차분한 격동의 달을 보내주었다. 오늘의 신청곡은 일종의 주문이다.
태풍의 눈 속에 앉아 한 달을 보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고요한 채 기행을 일삼았다. 개편을 앞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꽃다발을 들고 누군가 열차에 타면 그 칸에 있는 사람들은 향기롭게 목적지로 향한다. 그렇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이는 원래 가던 열차에 탑승해 수월하게, 멀리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꽃을 들고 있을 뿐.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진행자가 좋으면 향기롭게 목적지까지 가고, 그렇지 않대도 어떤 지점까지는 어떻게든 굴러간다. 그러므로 진행자가 이번 개편에 남아있게 됐다고 꼭 성공한 것은 아니나, 떠나게 된다면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최후변론 시간은 없다. 하루하루 성실히 내보인 '그동안의 나'가 심판대에 선다. 결과가 언제 나올까? 성패도 궁금했지만, 결과에 따라 달라질 내 생활과 시간도 불투명하다. 소용돌이치는 불안 속을 돌고 돌다가 어느 순간 그냥 갑자기 내려놓게 됐다. 하는 대로 했으니까 되는대로 되겠지.
한 일주일 동안은 남은 기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막상 하려니 뭘 어떻게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하던 대로 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뭐라도 더 얘기해봐야 하나, 잠깐 생각하다가 아무 말도 안 했다. 옛날에 개편을 당하는 편 말고 개편을 하는 편이었던 때를 생각해 보니 개편 준비 기간에 어수선하고 정신없고 누구랑 길게 말할 여력도 없었던 것 같다. 잘 한 건지는 모르겠다. 괜한 말을 하느니 아무 말도 안(못)하는 채로 있는 게, 내가 망설이다 늘 닿는 곳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마음으로 욕심과 잡념을 내려놓자니, 한동안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게 됐다. 다른 때라면 전훗날 스케줄을 고려해 약속을 잡고, 날씨나 컨디션을 먼저 생각한 후에 누굴 만나곤 했는데 지난달에는 누가 부르면 그냥 나가고, 여기저기서 머물고, 갑자기 만나고 그랬다. 생각하기를 생략했다. 전제가 없으니 편하고 쉬웠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도 있었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 좋고, 새롭게 만나니 좋았다. 당장 지금을 생각하고, 일단 여기서 즐거운 게 어떤 느낌인지를 완전히 알게 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벼우니 경쾌했다. 혹시 이게 욜로인가? 잠시 혼자 생각했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아프다는 지인의 소식을 듣고 작은 선물을 문자와 함께 보냈다. 평소에 개인적으로 연락은 안 하던 동료인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오래 생각하지 않고 보냈다. 평소 같으면 이게 그 사람에게 필요할까, 자주 왕래하는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뭘 보내면 부담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또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냥 지나칠 거였다. 그동안은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는데 이번에는 지금 얼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나쁜 마음도 아니고, 뭐 어때.
친구랑 인형 뽑기에 헛돈(결과적으로)도 썼다. TV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봤을 때는 딱 봐도 안 뽑히는데 왜 자꾸 돈을 더 넣지, 싶었는데 내가 하니까 눈이 돌아서 자꾸 돈을 넣게 되었다. 진짜 두 번만 더 하면 뽑힐 것 같았는데... 만 삼천 원을 날리고 휴대폰으로 인형 가격을 검색해 보니 삼천오백 원이었다. 스트레스 해소 비용이 아니라 스트레스 누적 비용으로 만원 넘게 썼다며 친구랑 같이 씩씩댔는데 뽑기를 할 때만큼은 저걸 기필코 내 손에 쥔다는 일념으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던 것을 인정하는 바이다.
봄에도 이 프로그램에 남아있게 됐다. 태풍의 눈 가운데 앉아있다 보니 태풍은 소멸됐다. 물론 가을개편 전까지의 소멸이다. 프로그램에 남게 된 사실이 나의 성패를 말해주진 않지만 적어도 진 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잠깐이라도 놓았다. 물론 내 잔류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 속사정까지는 내가 몰라도 되겠지. 앞선 걱정과 뒤돌아 후회하는 것을 잠깐이나마 멈추고 지금을 사는 게 좋았다. 지금들을 차곡차곡 쌓으면 무엇이 될까? 모른 채로, '그때가 좋았지'의 '그때'가 지금이라 여기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전부라 생각하며 지내기로 해본다. 지금이 우리의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