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도 꿈결

by 호이

오늘의 신청곡: 속아도 꿈결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곡 가을방학 / 작곡 작사 정바비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 장기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 어떤 양말도 금세 는 진취적인 엄지발가락의 퍼포먼스다. 파인애플 가시로 긁어도 쉽사리 올이 나가지 않는다고 광고하는 브랜드의 스타킹도 거뜬하다. 페이크 삭스는 열에 아홉이 한 번만 신어도 구멍이 난다. 덕분에 덧신류는 사도 사도 모자라고 구멍이 나지 않은 한 짝들을 모아 다시 새 페어링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의 아니게 신발을 벗어야 할 때, 현재의 발 상태가 조심성과 준비성이 결여되어 보이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거실에서 TV를 보다 엄마가 엄지발가락을 꼬옥 누른 적도 있다. 왜 그렇게 발가락을 치켜들고 있어?


이유는 모르겠다. 걸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나도 모르게 '따봉'을 외치는 엄지들의 의중. 혹시 내 발가락의 근육만 불수의근인가? 그럴리는 없겠지.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데다 고쳐지지 않으니 별 수 없이 올봄에도 거의 일회용일 예정인 덧신을 한 묶음 샀다. 로퍼나 플랫슈즈를 신을 때 덧신이 필요한데, 지난해 가을에 샀던 것들은 벌써 장렬히 보내주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새로 산 덧신들이 다 구멍 나기 전에 벌써 패디큐어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새롭게 발에 입힐 것들을 사면서 계절이 빠르게 흐르고 있음을 알아챈다.


짧은 시간만 누릴 수 있는 적정 온도의 계절이 가는 게 아쉽다. 다른 사람의 온기가 간절해서 나눠 받을 필요도, 신중하게 거리유지에 신경 써야 할 필요도 없이 원하는 만큼, 원하는 정도로 붙어있거나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계절.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큰 용기가 필요한 온도도,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극강의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온도도 아닌 딱 그 중간. 물론 걷다 보면 꽃가루에 눈이 간지럽고 재채기가 나오지만 길가에 서있는 어린 라일락의 향이 놀라울 정도로 멀리까지 따라온다.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속여야 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다. 내 뜻을 기어코 이루어내는 사람은 같은 조건을 놓고도 나 스스로를 원만하게 설득하고 때로는 속이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이것이(그것이 무엇이든) 최고다, 이만큼이 나의 최선이다,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최종의 목표다, 이루어질 눈앞의 꿈이다. 그런 착한 주문들과 속임들로 당장의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해내는 것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살면서 내가 속아 넘어간 말들도 대부분 내가 나에게 한 말들이다. 괜찮아.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잘할 거야. 될 거야. 더 나아질 거야. 행복할 거야.

앞으로도 나를 속일, 내가 속을 말들.







keyword
이전 15화맹그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