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 베트남 옥택연을 만날 수 밖에 없던 이유
망고를 다시 얻어먹기 위해 보낸 문자 하나가 베트남 옥택연과 나와의 시작이었다. 베트남 옥택연 오빠와의 만남을 처음부터 읽고 싶다면 이전 글을 확인해주세요.
베트남에 와서 내가 미친듯이 먹어치운 것은 망고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야식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고, 반대로 크로스핏을 해도 살이 안 빠지던 불변의 몸무게가 베트남에 온지 3개월만에 +3kg가 되었다?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매번 체중계에 올라설 때마다 역대 최고 몸무게를 갱신하고 있었다. 베트남 음식이 한국인에게 잘 맞고 싸고 배달이 편한 데에 비해 무더운 날씨와 오토바이로 점령된 도로로 인해 걷거나 움직이는 경우는 적었다. 살이 찔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매 점심시간마다 부풀어오른 배를 어루만지면서 한탄하는 나를 보며 베트남 직원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옥택연을 소개시켜준 직원 이모는 그에게 PT를 부탁해보라고 일렀다.
베트남 옥택연의 서사를 보자면, 그는 메콩델타 지역 시골마을의 농부 부모님 밑에서 자라와 본인에게 농부의 피가 흐른다고 하지만, 자수성가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혼자 호치민에 왔다.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호치민에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 학위라든가 국제적으로 인정할만한 학술적 성취는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독 어르신들에게 깍듯하며 그들과의 인맥을 통해 전통 의학, 건강 및 영양에 대한 배움을 얻고, 이와 관련된 온갖 기술 자격증을 모으기 위해 항상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그 과정 중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PT(퍼스널 트레이너)로 돈을 벌던 날들도 있었으며 그렇게 직원 이모를 알게 된 것이었다.
현재는 호치민 1군의 큰 스포츠센터 내에 자기만의 스포츠 재활치료 및 마사지샵을 운영하고 있고, 그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3명 정도 된다. 그의 서사를 보면 이미 굉장히 성공한 편이지만 (나보다 하루에 돈 많이 쓰는듯..) 그의 눈빛은 여전히 야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다. 그는 장남으로서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지지해줄 책임을 느끼고 있으며 지금도 재활치료샵 2호를 만들고 비즈니스를 확장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의 팔에는 굵은 줄 두 개의 문신이 있다. 언뜻 보면 톰브라운 짝퉁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한 줄은 '부모'를 또다른 줄은 '형제자매'를 뜻하는 것으로서 평생 가족을 생각하기 위해 남긴 의미있는 문신이라고 한다.
PT? 솔깃했다. 안 그래도 운동을 시작하고 싶긴 했는데 현지어를 모르니 어느 피트니스가 좋을지 어떻게 등록을 해야 할지 좀 막막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뭐 누가 봐도 남자의 마음을 이용해 다른 이익을 취득하는 나쁜 여자의 모습 아닌가! 차마 옥택연에게 부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옥택연과 내가 잘 되길 바라는 직원 이모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베트남 오빠에게 입김을 불어 넣었다. 이후로 베트남 오빠는 몇 번이고 내게 "Em oi ("엠오이/에머이" - 어린 상대를 부를 때 쓰는 말), what you do today?" You go to gym" 이라고 보내왔다.
그의 집요한 요청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를 만나기로 했다. 피트니스 센터 위치를 알려주면 가겠다고 했는데 그럴 필요 없다며 집앞에서 오토바이로 픽업해주겠댄다. 나는 부담스러워서 괜찮다고, 그랩으로 가면 금방이라고 했지만.. 그는 고집불통이었다. 결국 그는 오토바이를 끌고 우리 집 앞까지 왔다. 혼자 사는 여자로서 집 위치를 남자에게 알리는 것이 불편했다. 조금 꽁한 상태로 집 앞을 나섰는데 현관 문 앞에 오토바이를 비스듬하게 세워두고 나를 보자마자 방긋 웃는 베트남 오빠.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호치민살이 초보자라 피부 타는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어 반팔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는 그의 후드 외투를 벗어 나에게 덮어주고 후드 모자까지 머리에 씌워 지퍼를 끝까지 올린 다음, 헬멧마저 손수 씌워줬다. 나는 누가 봐도 베트남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주요 이동수단인 오토바이. 거의 제2의 핸드폰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남녀노소 누구나 한 대씩은 갖고 있는 당연한 국민템이다. 이 오토바이로 인해 파생된 베트남 문화가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따가운 햇살에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썬글라스, 마스크, 후드, 장갑에 헬멧까지 장착하는 닌자(Ninja) 패션이고, 또다른 하나가 사람과 사람 사이 신체적 거리의 폭이 최소화된다는 것이다. 도로 위 오토바이만 보더라도 테트리스 조각 마냥 오밀조밀 여유공간 없이 빼곡히 밀집된 것을 볼 수 있으며, 오토바이 위 사람들도 한 오토바이 위에 4인 가족이 다 꽉 붙어 타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2인이어도 마찬가지다. 뒤에 앉은 사람의 상체가 운전자의 등에 닿는 것도, 다리와 허벅지 안쪽이 운전자의 측면을 감싸는 것도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운 신체적 접촉이다.
이래서 베트남 옥택연의 오토바이 뒤에 탑승하는 것이 영 불편했다. 내 딴에는 거리를 좀 두고 앉겠다고 했는데 무용지물이었다. (이마저도 나중에는 몇 번 얻어타니 무감각해진다..) 뭐 어쨌건 베트남에서는 바로 이 오토바이 문화로 인해 데이트를 할 때 "픽업"한 뒤, 꼭 붙어있는 상태로 "드라이브"를 가므로써 로맨틱한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웬걸? 피트니스 센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디다스 매장에서 멈추는 것이다.
"여기는 왜....?" 라고 물으니 오토바이용 내 후드를 사주겠댄다. 엥 아니야! 괜찮아 나 외투 집에 많아라고 영어로 답해봤지만 알아듣지 못해서 그러는건지 뭔지 무작정 매장에 데리고 가길래 마지 못해 알겠다고 하고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서 때깔 나는 신상 후드집업을 이것저것 보니 신나버린 나...... 아아... 내가 이렇게 물질주의적이었던가.. 베트남 오빠는 색깔별로 후드를 집더니 탈의실 가서 입어보란다. 이거 뭐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 하나씩 입고 나올 때마다 어쩜 그렇게 아빠미소를 하면서 보던지.. 결국 오토바이용 외투이다 보니 때가 타도 티가 크게 나지 않을 검정색 후드집업으로 골랐다. 베트남 오빠는 호쾌하게 카드를 꺼내 긁었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무얼 사주는 것이 영 익숙치 않고 불편해서 가격이라도 보려고 기웃거렸는데 오메나.. 무슨 후드집업 하나에 12만원이죠?.. 그것도 공장 유출품으로 헐값에 명품 제품을 살 수 있는 베트남에서..?
여기서 잠깐! 베트남살이 한국인 라이프 엿보기
필자는 베트남에 온 이후로 Shopee - 쿠팡 같은 쇼핑 플랫폼에서 헐값에 고품질 브랜드 제품을 파는 곳을 발견하는 데에 크게 맛들였다. 크록스, 피엘라벤 가방, 아디다스/나이키 운동복 및 운동화, 노스페이스 여행용 가방 또는 바람막이, 아베크롬비 티셔츠 3장 등 각자 다 1만원 내외로 구매할 수 있다. 가끔 허술한 제품이 걸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 상당히 퀄리티가 좋아 쇼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베트남 오빠랑 쇼핑만 했냐구? 아니 실제로 운동도 자주 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운동을 해야 효과가 있대서 회사 직원들 다음으로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피트니스 센터도 그가 운영하는 곳이라 돈을 따로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이쯤되면 필자가 남자의 경제력을 이용하는 악녀 같이 보이겠지만.. 필자를 실제로 아는 사람은 다 얼마나 필자가 여자의 경제력에 대한 자존심이 센지 잘 알고, 특히나 필자는 독일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온 터라 물질적으로 채무관계에 놓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필자는 언니/오빠들보다 동생친구들이 훨씬 많은 편인데 오히려 샀으면 내가 샀지 얻어먹는 것은 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 네, 자기 변호는 이만하면 된 것 같고요..
문제는 운동을 하고 나서 최고치로 배고플 때마다 베트남 오빠가 배 안 고프냐고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고 꼬드기는거다. 운동 끝나고 집에 갈 때도 그가 오토바이로 데려다주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그랩 타고 가겠대도 절대 안 된다고 난리난리)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면 바로 식당 직행이다. 이것이 바로 PT를 두 달을 받았는데도 살이 오히려 더 찌게 된 비결이다... 베트남 오빠의 말에 의하면 운동을 할 때는 그렇게 미간을 찌뿌리고 인상을 쓰는데 밥을 먹을 때는 그렇게 반짝거리고 행복해 보인댄다.. 그래서 계속 행복한 표정을 보려면 식당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고.
꽃게탕 먹으면 게살 다 발라줘, 닭발 먹으면 뼈 다 발라줘, 면요리 나오면 라임 (베트남 필수!) 짜줘, 소스 다 넣어주고 비벼줘 세상에 그렇제 지극정성일 수가 없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이것은 베트남 옥택연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베트남 남자(스포일러)도 그러했다. 얼마나 공주님처럼 극진히 모시던지!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언어의 장벽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웃프게도 구글 번역기로 소통해야 했다. 이렇게 영어를 못하는 베트남 오빠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당시 필자가 베트남 4개월차였는데 베트남어 실력이 쭉쭉 올라서 주변 직원들과 사람들이 꽤나 놀랬다.
그렇게 운동하고 밥 먹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베트남 오빠의 직진과 과감함도 날로 더해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