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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30. 2020

위험한 자동완성 기능


문자 메시지의 자동완성


집사람이 아이에게 '오바마가 발 닦고...'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수년 전 일이다. '오자마자 발 닦으란' 잔소리가 자동 수정되어 미국 대통령의 사생활을 언급한 것이다. 기능에 시사성이 있는지 지금은 재현이 안된다. 카톡이나 문자 보낼 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의도치 않은 엉뚱한 내용이 발신된다. 휴대전화의 작은 자판에서 생기는 오타를 걸러주는 자동 수정이나, 나머지를 완성시켜주는 자동완성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작성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집에 가다가 뭐 좀 사 가려고 돌아가는데 내비게이션이 눈치 없이 계속 자기 경로를 시끄럽게 고집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런지 포탈에 가면 자동완성 끄는 방법이 많이 올라온다. 문자 메시지 자동완성 기능으로 생기는 문제는 심각하지 않다. 모르고 잘 못 나간 거는 한 번 웃고 넘기든지 사정을 얘기하면 된다



대화의 자동완성


자동완성 / 수정 기능은 휴대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상대방 말의 첫머리만 듣고 나머지 부분을 지레짐작하여 완성시켜주는 맞장구도 일종의 자동완성이다. 해외에서 근무하면서 아쉬웠던 게 바로 이거다. 현지인 동료에게 또박또박 영작문을 해서 마침표까지 찍어가며 얘기해 주는데도 잘 이해를 못 하면 (물론 내 탓이오) 답답하다. 띄엄띄엄 몇 마디 하면 즉시 내 의도를 파악하고 행동에 돌입하는 한국의 영민한 동료가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설의 고향으로 가자고 해도 예술의 전당에 데려다주는 택시 기사같이 친절한 자동 완성 소통에도 문제는 있다.


다양성을 억압한다. :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 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에서처럼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구조다. 서술어 특히 종결 표현으로 결론이 백팔십도 달라질 수 있는 말의 주어가 끝나기도 전에 경솔하게 맞장구치는 건 도박에 비유할 수 있다. 상대방의 를 대충 짐작하고 앞질러 가는 건데, 그 패는 당대를 풍미하는 사조思潮 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당연히 화자가 당시 유행하는 사상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또는 거스르지 말라는 오만함에서 선수를 친다고도 볼 수 있다. 동질성은 자동완성의 기본 조건이다. 여기서 '내 말은 그게 아니고요' 하며 찬물을 끼얹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동질감의 반대말이 이질감異質感이 되는 사회에서는 자동완성 기능이 바쁘게 돌아간다. 동시에 소수의견은 밟히고 만다.


좀 위험하다 : 가끔 조직의 수장을 보좌하는 이를 '윗사람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라는 표현으로 추켜세운다. 말도 하기 전에 완성시켜 버리는 자동 완성식 소통의 극치다. 거시기가 거시기하다고 해도 이해하는 수준이다. 상사의 의중을 이심전심 파악하는 덕성이 빠른 실천에 보탬이 되는 반면, 상사의 엉뚱한 철학을 견제하는 제동장치를 무력화시켜 대형사고에 이를 수 있다. 자기를 천거해 준 고마움에, 잘못된 길을 가는 상사에게 맹종하고 동조하다 동반 추락하기 일쑤다.



자가 자동완성


직장에서 부하가 실수를 하면 즉시 그 동료의 과거 이력을 소환해서, 실수의 과정이나 원인을 단정하고 화를 낸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편향된 기억만 가지고 결론을 낸다.


'교인이 코로나에 걸렸다'라고 하면, 집회 금지를 무시하고 교회 가서 예배보고 같이 밥 먹다 코로나에 걸린 걸로, 그리고 다른 이들을 연쇄 감염시킨 광신자 '사건'으로 구성하고 분개한다. 사실은 교인이 교회에 가지도 않았고 종교와 무관한 모임에 갔다가 병을 옮은 사례도 많은데 말이다. 집단적인 확증편향에 의한 자동완성의 폐해다.


그런가 하면 틀에 박힌 선입견에 의해 상황을 일방적으로 판단한다. 필자의 과거 글에서 소개한 일화인데, 제주도에 출장 간 임원을 휴가 간 걸로 오해하고 화를 냈다는 재벌 총수의 예가 그런 경우다. 총수가 제주도는 휴가지라는 선입견에 의해 자가 완성한 상상으로 말미암아 그 불운한 임원은 승진에서 번번이 탈락하다가 그만두었다는 후문이다.

잘못된 기억을 우기는 경영자    https://brunch.co.kr/@hhjo/28


        

U.S. Military In Iraq - CBS News

위에서 왼쪽 사진은 미군이 이라크 군 포로를 학대한다는 여론을 부채질한 사진인데, 오른쪽 미국 CBS 뉴스의 취재 사진 원본을 악의적으로 편집했다.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한 조작이다.


자가발전식은 가장 문제가 많은 자동 완성의 유형이다.

부분적인 정보만 가지고 나름대로 조용히 시나리오를 완성해 버린 다음 기뻐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한다. 가끔은 슬픔에 빠진다. 좀처럼 자기 판단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면서 일을 그르치고 남에게 상처를 준다.


나는 망막 일부에 막membrane 이 생겼다고 해서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는다. 큰 불편은 없지만 일 년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 가서 눈 CT 촬영 같은 검사를 받는다. 망막 질환은 실명에 이를 수도 있는 중증이라서 망막 안과의 분위기는 '속눈썹 찌름' 고치는 과와 달리 육중하다. 그날도 검사를 먼저 받고 쭈그리고 앉아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데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노부부의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소리에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오늘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는 거야' 남자 노인이 한숨 섞인 소리를 두어 번 되풀이한다. 실명을 해서 자기 아내를 영영 못 보는 심정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중에 진료 순서를 보고 나서야 나는 안도했다. '마지막'은 노인의 시력이 아니라 진료 순서이었다. 망막과 의사는 여자 노인을 오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오후에는 외래진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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