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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27. 2020

낯선 아이를 데려다주다 떠오른
실없는 생각

동행同行에 대하여

윤슬 작가님의 최근 브런치 글을 읽고 생각이 났다. 


https://brunch.co.kr/@yunseul125/31


작년 가을날 오후 서너 시 정도였던 같다. 길옆에 코스모스가 드문드문 피어 있었던 같기도 하고...


동네 초등학교 앞을 걸어가는데 교문 밖에서 작은 남자아이가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냥 우물쭈물 지나친 건 마침 마을버스를 놓쳐 약속 시간에 대기가 빠듯했고, 또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려다 오해받아 낭패를 봤다는 얘기가 생각나서였다. 요즘은 매사에 겁이 더 많아졌다. 조금 가다가 발걸음을 돌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어린아이가 소리 내어 서럽게 우는 데다 근처를 지나가는 엄마들도 안 보이고 정문 너머 학교 운동장도 조용했다. 곤경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아이를 내버려 두고 가서는 안될 일이었다.


사정을 물었더니 흐느끼면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요즘 고만한 아이하고 얘기해본 경험이 없다. 일 학년이라는데 '방과후 수업', '애들하고', '태권도' 세 마디만 되풀이했다. 엄마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역시 답이 난해했다. 엄마한테 전화하면 안 된다는 건지 엄마가 전화를 안 받는다는 건지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보충질문을 해가면서 해독이 안 되는 부분을 추리로 메꾸고 해서 나름 맥락을 짚어봤다.


상황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하고 놀았다.
놀다가 태권도장 버스를 놓쳤다.


우는 이유
태권도를 못 가서 엄마한테 혼나게 생겼다.
문제의 책임이 친구에게도 있는데, 상황상 자신이 떠안게 되었다.
사태를 되돌릴 수 없어 후회막급하다.


내 추리가 맞는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호전시킬 수 있는 묘안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아이를 집으로 보내주는 것 밖에 없다. 한번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고통스러운 세상 이치를 일단 아이에게 전수해 주었다. 따라서 오늘 일과는 여기서 마감하고 '퇴청' 하시는 게 지당하다고 제안하며 혼자 갈 수 있겠냐니까 반응이 분명하지 않다.


그럼 집에 가는 길은 아냐고 하니 그렇단다. 어차피 요즘 초등학교는 통학거리가 짧다. 국민학교 일 학년 때부터 버스를 갈아타고 다닌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이다. 그럼 내가 데려다 주랴하니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양측의 소통의 질이 향상되고 있었다. 가방 하나를 내가 들어주며 매직으로 크게 써놓은 반과 이름을 외워 놓았다.


가면서 뭔가 공통 화제를 찾기에는 두 남자의 세대 간격이 너무 컸다. 컴퓨터 게임을 할 줄 모르는 게 생전 처음으로 아쉬워졌다. 그렇다고 호구조사를 할 수도 없다. 그 아이가 산다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이르렀을 때 아이의 상태는 많이 진정되었다. 그럼 여기부터는 혼자 가겠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며 도리어 내 손을 잡는다. 


미래가치가 엄청난, 나를 신뢰하는 한 인간이 도움을 청하고 있다. 잔존가치가 마이너스인 친구 놈들과의 약속 시간 따위는 비교의 가치조차 없다. 단지로 들어가면서 애를 맡기려고 아파트 경비를 찾아도 안 보인다. 몇 동이냐고 묻는데 12층이라고만 하며 아이는 동과 동 사잇길을 익숙하게 빠져나간다.


아파트 로비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같이 들어 가지고 한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거라 아가, 내가 너무 많이 왔다. 아이를 계속 따라가서 집 호수까지 확인한 저의가 뭐였냐고 나중에 형사가 다그치면 할 말이 궁하다. 나도 수사반장 깨나 본 사람이다. 동 앞까지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그 이상은 형량이 가중될 수 있다. 아이 핑계를 대봐야 아이가 자신의 추궁을 경감시키기 위해 나의 손을 놓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배신이 아니라 자기 방어다.




아파트를 빠져나오면서 아이가 일 킬로미터도 안 되는 자기 집에 처음 본 사람을 끌고 가려고 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경계에서 신뢰로

사람이 우는 데는 구조 요청 신호를 발신하는 목적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고 우선 자기편인지를 판단한다. 나와 대화를 하면서 아이는 동물적인 촉으로 상대방의 유해성 여부를 측정한 것이다. 그 방식은 오히려 어른보다 더 예리할 수도 있다.


내가 4-5 살 때, 이웃집 아줌마나 이발소 아저씨 같은 낯선 사람을 만나면 즉시 이 사람이 내게 우호적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려고 노력) 했다. 연약한 신체를 방어하는 보호 장치인 셈이다.  그 식별의 메커니즘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눈 하고 관계가 있었다. 누구나 어린아이 때는 피아를 직감으로 알아채는 능력이 있었는데 자라면서 퇴화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어려서는 우유의 유당 (락토스)를 분해하는 효소인 락타아제를 가지고 있다가 크면서 없어져서 우유만 마시면 설사하는 사람처럼.

부정확할 수는 있지만 자라면서 계속 이어서 전달되어 온 기억이다.


신뢰하는 이와 동행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옆에 누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물리적으로도 다리에 힘이 빠져있다. 귀가와 동시에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발걸음은 집에 접근할수록 무거워진다. 고통에도 도플러 효과가 적용된다 ( 순전히 내 주장임). 전초적 단계로 시작해서 고통 그리고 그 기억으로 이어지는 고통의 전개 과정에서 양단兩端의 비중이 본 게임 못지않다. 매도 먼저 맞으라는 말은 그 전초적 단계를 줄이자는 취지다. 같은 방향을 보며 나란히 걸어가는 동행자의 어깨가 다가오는 고통의 공포를 가라앉혀준다. 마치 동행자가 끝내 고통까지도 나눌듯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12층까지 가자 했을 수가 있다.


도플러 효과
1842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도플러(Christian Doppler)가 처음 제안한 물리 현상이다.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물체가 관측자에게 다가올 때는 관측되는 전자기파의 파장이 짧아지고, 그 물체가 관측자로부터 멀어질 때는 관측되는 전자기파의 파장이 길어지는 현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플러 효과 [Doppler effect] (천문학백과)


나를 신뢰하는 이의 손을 잡아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소중한 기회는 그냥 오지 않는다. 좌우를 찬찬히 살피고 가다가 돌아오는 수고가 있어야지 동행을 보시普施할 수 있는 영광을 안는다. 나도 언제 동행자가 필요할지 모른다. 동행도 품앗이다.






내가 다음날 학교에 전화를 걸어 아이의 가방에 쓰여 있었던 반의 담임 선생님을 찾은 이유는,


아이 말을 들은 부모가 불안해할까 봐서 나의 신원을 밝히고,

아이의 가방에 아이의 소속과 이름을 써서 노출하는 건 위험한 것 같다는 얘기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애들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접근하면 빨리 친근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앞으로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 가르치라고 해주고 싶었다. 



부모로부터 전화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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