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감 Apr 23. 2023

마누라도 안 읽(어주)는
브런치 스토리를 쓰는 이유

아내에게 무심코 내가 올린 브런치 글에 대해 물었더니 그거 읽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하데요.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땔 거예요. 그 사람 집에 있는 날은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습니다. 결론은 남의 글 읽기도 바쁜데 남편 글은 무슨... 이란 얘기가 되나요? 임윤찬 유튜브는 백 번도 더 돌려보더군요.


주위에 제 브런치 링크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요. 글 쓰면서 '속 보이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마누라도 안 읽는 제 글을 여기저기 '마케팅' 하는 게 겸연쩍기 때문입니다. 실수로 제 카카오 계정에 연결했거나, 글을 몇 명과 공유하다 '들키는' 바람에 미안하게도 지인 몇 사람이 구독자가 되었지요.


전문가가 아니라고 한 수 접어줘도 제 글발이 썰렁한 건 사실입니다. 저의 부족한 창의력과 표현력을 끈기(=엉덩이 전략)로 문대 보지만 한계가 있더군요.


게다가 제 글의 내용물(콘텐츠)이 비 인기 종목입니다. 브런치 스토리에서는 직장 상사의 갑질과 그로 인한 이직, 시집 식구들과의 갈등 ⇒이혼⇒돌싱 따위 30-40대의 시대적 고민을 다룬 얘기가 잘 팔립니다. 육아, 음식, 여행(적어도 제주도), 외국 살이 체험도 관심을 끌고요. 아니면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의 수기처럼 신기하거나 실용적이든지요.


브런치 스토리의 필명부터 꼰대 티가 팍팍 납니다. 말하는 습관 갖고 트집 잡거나 옛날 얘기 늘어놓다 '~해야 한다' 훈계조로 글을 마무리하니 글이 '구리고' 제목도 섹시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아주 가끔 조회(정확하게 말하면 클릭) 수가 주유소 미터기처럼 가파르게 올라간 글들도 지금 생각하면 회식, 김밥 같은 소재로 쓴 잡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왜 브런치에 꾸역꾸역 글을 올리는 걸까요?


나이를 먹으면서 후배들에게 전하고픈 조언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걸 말로 했다간 대번에 가르치려 든다 소리 나와요. '공익'적인 충고가 잔소리(=라떼)로 변질 돼버리는 거지요. 대신에 글로 풀어서 인터넷에 슬쩍 올려놓으면 언젠가 누가 꺼내보지 않을까요? 사이버 공간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잖아요. 글은 일방적인 면이 있어서 대화나 토론에서처럼 중간에 끊기는 일도 없고요. 다만 독자가 읽다가 집어던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생각이 좀 정리됩니다. 전문가는 생각이 말과 글로 물처럼 흐른다지만, 저는 표현하기 전에 일단 생각부터 손을 봐야 합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있다니까요. 생각의 파편들을 모아서 차곡차곡 접고 꾹꾹 눌러 공기도 좀 빼주면 각이 잡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합니다. 다른 생각이 들어갈 공간도 확보되고요. 이렇게 해서 생산한 글이 거꾸로 생각을 편집하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경제적, 사회적 소외감 그리고 지력과 체력의 손실로 인한 상실감을 경험하는 데요, 이를 극복하는데 글쓰기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미국 남 미시시피 대학 ( University of Southern Mississippi)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충격적인 일을 겪은 대상에게 하루에 15분, 일주일에 나흘씩 감정 상태에 대해 글을 쓰게 했더니 그렇지 않은 대조군보다 우울감과 불안감에서 빠르게 회복하더랍니다. 노년에 글을 써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지요.  https://pubmed.ncbi.nlm.nih.gov/11010659/


뭐니 뭐니 해도 글을 매개로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공유하는 경험은 유쾌합니다. 브런치 스토리 공동체의 작가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닫혔던 지적 성장판이 다시 열립니다. 바이에른의 슈타른베르크 호수 Starnberger See를 여행 버킷 리스트에 보탠 이유도 브런치의 morgen 에세이스트가 최근에 올린 글 '섬 여행'에서 소개한 엘리엇의 시 '황무지' 이야기를 읽고 나서입니다.

https://brunch.co.kr/@erding89/310




블로그 글쓰기가 취미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요. 취미로 격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골프가 하도 안 늘어서 '나는 안 되나 봐' 하고 좌절하던 생각이 납니다. 아직은 자기 수양을 위해 쓴다는 게 무난할듯합니다.


어떤 칼럼니스트는 컴퓨터에 첫 줄을 치는 순간 글 전체의 틀이 좌악 잡힌다고 하던데 부러울 따름이지요. 저는 글의 구조를 설계하는 단계가 제일 막막하고 진도도 안 나가거든요. 던지려는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을 때 더 그런데요, 쓰다가 삼천포로 빠지거나 과연 이게 글이 될까 하는 공포심에서 중도 포기도 합니다.


반대로 메시지가 뚜렷해도 문젭니다. 집을 짓다가 우람한 기둥이 아까워서 슬쩍 설계 변경해서 복층을 올리는 ( =글을 새끼 쳐서 두 편으로 쪼개는) 사술을 부리는 데 이때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의 소설가 쿠르트 보네거트 Kurt VONNEGUT는 책 'Pity The Reader'에서 주제가 강력하면 혀가 꼬여 전달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럴수록 한 박자 쉬고 돌아서 가라는 얘기지요. 평생 힘 빼란 소리 듣고 사는데 여기서도 한 소리 듣네요.


쓸 거리가 없어 지난 일들을 닥닥 긁어 글을 지을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 끼닛거리 떨어져 가재도구 내다 팔았다는 얘기가 실감 나요. 요즘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 시시콜콜 가정사까지 끌어내 '얘기 꺼리'로 만드는 식입니다. 특이한 체험을 많이 해서 쓸 것(=썰)이 풍성한 다른 작가들이 순간 부럽지만 그게 바로 실력이지요.


곡절 끝에 브런치에 글 하나 '발행'한 날은 맥주 깡통 두 개 까고 라면 한 봉 때린다든지 하는 소박한 골 세리머니를 치릅니다. 평소에 삼가는 사악한 (sinful) 행위를 저질러서 셀프 보상하는 의식이지요. 그래야 몸이 기억하고 있다가 '창작의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속셈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먹어주고, 마셔주고' 하는 자기 타자화가 오글거렸는데 흉보면서 닮아갑니다.




필설 총량 불변의 법칙 같은 게 있다면 글을 쓰는 만큼 말이 줄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영화의 주인공처럼 생각만 가득하고 과묵했으면 좋겠는데, 말도 글도 절제하지 못하고 괴발개발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읽어주는 구독자들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따지지 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