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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Oct 18. 2023

이름 없는 풍경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50~52

Day 50 산타페-애비퀴우


오늘 너무 좋다. 아침까지만 해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다 짜증이 나서 여행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는데 내리막길이 시작되면서 어마어마한 풍경이 펼쳐졌다. 산타페와 애비퀴우 중간 정도의 지점에 있는 에스파놀라까지 가는, 뒤에 자전거를 거치할 수 있는 버스가 있어서 타고 갈까 하다가 결국엔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정말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바람은 찼지만 등 뒤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가는 길에 이 근처에 산다는 라이더를 만났다. "이런 멋진 곳에 살다니 당신은 행운아군요!" 내가 말했다. '환상이다, 환상' 계속 감탄하며 라이딩을 했다. 산타페에서 에스파놀라까지 풍경도 좋았지만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되어서 길 자체가 자전거 타기에 좋은 길이었다. 자전거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 캐니언 같은 슈퍼스타 말고 무명의 풍경들도 이렇게나 멋있다. 그리고 사실은 이름 없는 풍경이 지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나도 이름 없는 무수한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든지 늘 그 분야 최고의 것들과 내 것을 비교하곤 했다. 최고의 것 옆에서 내 것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그래서 초반의 자신감은 곧 사라지고 위축되고, 자신감이 떨어져 손을 놓아버렸다. (그래서 이 여행기도 이제 와서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건 아닐까? 서툴더라도 열심히 쌓아 올리는 붓의 터치 하나하나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완성해 나가려는 의지와 열정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여행 전, 자전거 아메리카 종단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남성 여행자가 개최하는 세미나에 갔었는데 거기서 참가자로 만난 60대의 은퇴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치가 분명 있어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여행에 도전한다는 것. 당신의 여행이 바로 그거예요. 그것을 나누세요. 분명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세요."


선생님은 나를 꿰뚫어 보신 것 같았다. 내가 내 가치를 의심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렇게 자신감이 없고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렇게 나에게 끝까지 걱정 어린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주가 바뀌어서 한 시간, 계절이 바뀌어서 또 한 시간이 빨라졌다. 보통 때보다 해가 2시간 일찍 지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7시 전에만 도착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느긋이 풍경도 감상하고 멈춰서 사진도 정말 많이 찍고 삼각대를 놓고 포키와 사진도 찍으면서 갔다. 그런데 웬걸, 4시 반이 되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다섯 시가 되니 깜깜해졌다. 결국 어둠 속을 달렸다. 오늘은 웜샤워를 구해서 잘 곳이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둠 속을 달려 마침내 주유소에 도착했다. 핸드폰 신호가 터지지 않아서 핸드폰을 빌려 호스트 메헤디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주유소로 데리러 와 주었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밥을 먹었다. 호스트는 젊은 커플로, 둘 다 프리랜서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곳은 마약이 합법이라 내게도 해보겠냐고 권했지만 겁이 나서 거절했다. 약을 하면 영감이 더 잘 떠오른다고 했다. 식사를 마친 뒤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Day 51 애비퀴우 휴식


어제 깜깜할 때 도착해서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현관을 열고 나가보니 이런 장관이 없었다. 어제 자전거 타면서 내내 감탄했던 풍경들이 집 주위에 널려 있었다. 오늘은 집 주변을 구경하기로 했다. 출출할 때 먹기 위해 토마토를 썰어 아보카도를 으깬 것과 섞어 스테인리스 용기에 담고, 나초 봉지를 챙겼다. 그리고 색연필과 스케치북, 물을 가방에 넣고 바람막이와 패딩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예술이었다. 궂은 날씨도 그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다. 가다가 아무 곳에 멈추어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챙겨 왔지만, 내게 낯선 곳에서 자전거 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그림 그리는 일이다. 너무나 하고 싶지만 너무 어려운 것. 예술 작품은 두려움을 뚫고 나아갈 때에야 만들어지는 것 같다. 용기를 내 색연필을 들고 백지 위에 느낌 가는 대로 그려 보았다. 한창 재미 붙이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춥기도 해서 미완성된 그림과 짐들을 챙겨 일어나 플라자 블랑카로 향했다. 비 오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멋지다 멋져. 멋져. 플라자 블랑카(Planza Blanca)는 영어로 'white place'를 의미한다. 수세기에 걸쳐 바람과 물에 풍화된 하얀 돌들의 독특한 형상을 보고 있다 보니 흘러간 기나긴 세월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가 와서 돌에 난 구멍 속에 들어가 비를 피하며 사진을 찍고 놀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너무 추워져서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너무 춥다. 아무래도 서쪽으로 곧장 가는 것보다는 돌아가더라도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집에 돌아와 피곤해서 낮잠을 잤다. 


비가 많이 온다. 

쉬기 좋은 날이다. 



Day 52 애비퀴우 - 산타페


얼마간의 휴식을 마치고 처음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기에 오늘은 다시 산타페로 간다. 마트 겸 기념품 샵에 들렀는데 조지아 오키프 그림엽서가 있어서 몇 장 구입했다. 이제 계속 남쪽으로 갈 것이다. 추운 것보단 따뜻한 게 좋겠지. 그래야 활력도 더 생길 것 같다. 

 다시 온 산타페는 여전히 멋졌다. 다른 주에서와 달리 뉴멕시코주에서는 월마트에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장 볼 때마다 밖에 두고 오는 포키가 마음에 걸렸는데 이곳에선 마음 편히 장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마주치는 직원마다 "I love your dog"라고 말하며 반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뉴멕시코주는 동부에 비해 아보카도가 저렴해서 자주 사 먹었다. 

 오늘은 산타페 모텔6에서 잔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결국 남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route66 말고 Southern Tier라는 라이딩 루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산타페에서 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i25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길이다. 거기서부턴 이 루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지.


나의 영원한 동행 포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자. 

그리고 나에게도, 나에게도..


포키와 아름다운 걸음을 걷고 있는 이 날들, 

이 순간들에 

더 온전히 머물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이 날들이 얼마나 그리워질지 안다. 

분명 이 길 위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겠지. 

그리고 행복해하겠지.


언젠가 포키와 이별할 순간을 떠올리면 

나는 어떤 심정이 될지 너무 두렵다. 

그러나 아픈 걸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아프지 않은 걸 두려워해야 하는지도 모르지..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기. 

이 길 위에서 이뤄야 할 숙제다.


볼펜 사자.


-이 날의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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