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90일 자전거여행] Day53~55
Day53 산타페 – 베르나릴로
산타페에서 애비퀴우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오늘은 새로운 길로 향하는 날이다. 지도의 선들을 보다 보면 선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지점들이 어떤 풍경일지 몹시 궁금해지고 설렌다. 산타페에서 엘버커키로 향하는 길은 비교적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가는 길이라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풍경도 지난번 산타페에서 애비퀴우 가는 길처럼 아름다웠다. 포키는 추울까 봐 패딩으로 감싸줬지만 자전거 타기에는 괜찮은 날씨였던 것 같다.
쓰지 않은 일기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까? 세상이 같은 색으로만 칠해져 있다면 지금처럼 아름다울까? 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강과 돌, 꽃과 풀, 흙이 있고 별과 달이 있는 것처럼 지구의 풍경이 그토록 다양하기에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다. 모두가 별이 된다면 혹은 모두가 강이 된다면 세상은 지루해질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무든 풀이든 강이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처럼 모두가 같아지려 할 필요는 없다고.
잘 곳 구하기가 어렵다. 소방서에 가도 거절, 교회도 거절. 내가 여자라 더 그런지 혹시 모를 책임에 휘말리기 싫다고 이야기하며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한 아저씨가 캠핑장이 있는 것을 알려주어서 캠핑장에 가서 짐을 풀었다. 도착하면 저녁까지 해 먹을 힘은 남아있지 않아서 보통 과자 같은 것으로 때우고 잠을 자곤 했다.
Day54 베르나릴로 - 앨버커키
텐트를 정리하고 짐을 싸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가는 길에 만난 어떤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셔서 사진을 찍는데 포키는 낯선 아저씨를 보고 마구 짖었다. 지난번 타이어가 터진 이후로 처음으로 펑크가 났다. 그때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고, 그때 배워 놓은 덕분에 이제는 혼자서도 어디서든 타이어 펑크를 때울 수 있다. 주차장 구석 쪽에 자리를 잡고 우선 자전거에서 짐을 분리했다. 그런 다음 자전거를 뒤집고 타이어를 분리한 뒤 펑크를 찾아 패치를 붙였다.
그나저나 해가 너무 빨리 진다. 며칠 째 야간 라이딩을 피할 수 없었다. 6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암흑이다. 시간이라는 숫자 때문에 그렇다. 시간이라는 숫자의 리듬에 맞춰 사는 게 맞는 걸까 해의 리듬에 맞춰 사는 게 맞는 걸까? 어찌 보면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이라는 규칙에 맞춰 살고 있는 일이, 시간이 두 시간 빨라졌다고 그 숫자에 내 하루를 맞추고는 해가 빨리 진다며 야속해하는 일이 과연 맞는 일일까 싶기도 하다. 서머타임이 끝나는 11월 초, 어둠이 일찍 찾아와서 사고 증가율이 평소보다 늘어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펑크를 때우느라 시간이 지체되어서 앨버커키에서 자기로 하고, 모텔을 잡고 짐을 푼 뒤 월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꾸물대다 출발이 늦어져도,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에게 "Are you fucking crazy?"라는 소리를 들어도
해가 다 질 때까지 잘 곳을 구하지 못해도
무지막지한 오르막길이 눈앞에 나타나도
텐트 안이 찌는 듯이 더워도
출발하려는데 타이어에 바람 빠진 것을 발견했을 때도
분명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장갑이 사라졌을 때도
빈털터리인 내 모습이 한없이 미워 보일 때도
그냥 웃어 넘기자고 다짐했다. 강물에 나뭇잎 띄워 보내듯 그저 흘려보내자.
모든 것이 흘러갔지만 그것들이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단 말인가? 키티는 모든 인류가 저 강물의 물방울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타인처럼, 이름 없는 강줄기를 이루어, 그렇게 계속 흘러 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Day55 베르나릴로 - 벨렌
루트 66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향하는 중이다. 남쪽으로 갈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 힘든 길이 시작될 것 같다. 서쪽으로 가기 위해선 산맥을 한 번은 반드시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편은 아니어서 혼자 하는 여행도 무리 없이 하곤 하지만,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 같다거나 아무도 나를 추억하지 않을 것 같을 때 외롭다는 감정이 밀려드는 것 같다. 바람과 추위가 나를 괴롭히지 않을 때는 몰려드는 상념들로 괴롭다. 어느 게 나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역시 잘 곳을 찾기 위해 소방서도 가보고 경찰서도 가보았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다. 그다음으로는 교회에 가 보았는데, 한창 예배가 진행 중이었다. 예배 끝나기까지 50분이 남았다는데 기다려 보는 게 맞는 일일까? 그때가 되면 깜깜해질 텐데 안 된다고 하면 그때 가서 어떡하지. 쉽지 않다.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으니 기다려 보기로 하고, 예배 시간 끝날 때까지 동네 한 바퀴 돌아보며 마당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마당에 하루 텐트 쳐도 되는지 물어보았지만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교회에 다시 돌아오니 예배가 끝나 있었다. 목사님이 집으로 돌아가는 신도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옆에 서서 기다렸다. 몇몇 신도들이 포키를 보고 귀여워했는데 그중 여자 두 분이 "오 마이갓 쏘 큐트"라고 하며 특히 좋아해 주셨다. 내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잠시 나누고 그들과 헤어진 뒤 목사님께 텐트를 쳐도 되는지 물었다.
"저쪽 묘지 옆에 치는 건 좀 그러려나요?" 목사님이 말했다.
"혹시 다른 곳은 없을까요?"
"그럼 저쪽 건물 뒤편에 치는 게 어때요? 교회 앞 잔디에 쳐도 되긴 하지만 내일 아침 8시에 예배가 있어서 7시부터 사람들이 오기 시작할 거예요. 어쨌든 치고 싶은 곳에 치도록 해요."
말씀하신 건물 뒤편으로 일단 가 보았는데 묘지가 바라다 보였다. 여기에 치면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서 있는데 아까 "오 마이갓 쏘 큐트"하시던 여자 두 분이 차를 타고 다가와 잘 곳은 구했는지,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내게 물었다. 목사님이 여기에 텐트를 치라고 했다고 하니까 밖에서 어떻게 자냐며 안에서 잘 수 있게 호텔을 알아봐 주겠다고 하셨다. 모텔에 전화해 보더니 가격이 비싸서 그냥 자기 집에 가서 자자고 하셨다. 집은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어서 내가 자전거를 타고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차를 몰고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언니 아이다메이와 동생 린다. 아이다메이는 70살인데 처음에 49살이라고 하셔서 진짜 믿었을 정도로 젊어 보이셨다. 그들은 여섯 형제 중 두 자매였다. 내 여행에 굉장한 호기심을 보이시며 이것저것 물으시고 같이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아이다메이도 강아지 한 마리(다른 한 마리는 강아지별에 갔고)와 고양이 네 마리를 키우고 계셨다. 포키를 (최강 꼬질이임에도) 너무 귀여워해서 계속해서 포키에게 "쏘 큐트"라고 하셨다. 내가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자겠다고 했는데도 안에서 자라고 하셔서 결혼해서 출가하여 비어 있는 아들 방에서 자게 되었다. 게토레이와 부리또와 감자칩을 먹고 이야기하다가 씻고 누웠다. 아이다메이가 입고 잘 잠옷도 주었다. 동생 린다 아주머니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데 내일 아침을 만들어 줄 테니 건너오라고 하셨다. 그들은 원래는 일요일 예배에 가는데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토요 예배에 갔고 거기서 나를 만난 것이라 이 모든 것이 신이 계획하신 일이라고 믿으신다. 신이 우리를 만나게 하신 거라고. 믿음이 없는 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시간이 두 시간 느려지니 좋은 점은 잘 곳을 구한 뒤 저녁 먹고 씻고 나왔는데도 잘 때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여유롭다는 것이다. 덕분에 따뜻하게 잘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