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0대 이야기
교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의 감격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정식 발령 후 처음으로 맡은 학급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안이라는 소리는 조금 들어보긴 했는데 학생들과 워낙 격 없이 지내다 보니 난감한 상황도 종종 있었다. 아이들과 교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 선생님 어디 가셨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고, 급식실에선 조리원 종사자분들께 종종 반찬으로 김치 한 쪼가리씩을 받곤 했다. 내가 머뭇거리며 서 있자 배식 담당하시는 분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왜? 아가~ 더 줘?”
“…”
“(잠시 침묵) 아이고, 난 선생님인 줄 몰랐어요. 학생인 줄 알았지.”
신규의 열정으로 늘 교재연구를 하느라 가방엔 서너 권의 지도서와 교과서를 두둑이 챙겨 다녔다. 우연히 출근 버스에서 만난 교무부장님이 내 가방을 들어보고 깜짝 놀라며 무엇을 그리 무겁게 갖고 다니냐고 물었다. 그래서 벽돌 좀 넣고 다니면서 수련 중이라고 말했더니 웃으며 진짜냐고 직접 살펴보기까지 했다.
매일 밤늦도록 수업 준비를 하고 다음 날 나 혼자 멋진 수업에 대한 기대에 부풀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내가 준비한 만큼 호응이 없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벌컥벌컥 화를 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슬아슬한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하루 벌어 수업하고 또 하루 벌어 수업하고 또 …
난데없이 합창부를 맡게 되어 난감한 적도 있었다. 음악이라고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일 년간 배운 피아노가 다였다. 약간의 음치와 박치를 겸비하는 나의 노래 실력으로 합창 지도는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난 열정적인 신규였다. 급한 대로 지휘 레슨을 받으려고 수소문한 끝에 학교 근처 음악학원에서 한 달에 30만 원 레슨을 받게 되었다. 거금의 자비를 들여 두 달 동안 애국가 지휘는 확실하게 배웠다. 그때 그 선생님이 애국가 지휘를 얼마나 심도 있게 가르쳐 주셨던지. 무궁화 삼천리를 열창하며 손끝으로 무궁화를 피워내고 점점 동작이 커지며 화려강산을 허공에 그렸다. 학교 입학식 및 졸업식 행사 때마다 앞에 나가서 지휘했는데 어떤 학부모가 내 지휘를 아주 감명 깊게 봤다며 인사하러 올라온 적도 있었다. 애국가 지휘에 뭐 그렇게까지?
합창부에 대한 나의 열정은 신혼여행 일정을 반토막 잘라먹기까지 했다. 하필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가 있는 기간에 합창대회 일정이 잡혔다. 태국 리조트에서 한창 물놀이하며 즐기다가 특별휴가 기간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부랴부랴 돌아와서 합창부 대회에 나가는 버스에 올랐다. 신혼여행지에서 화끈하게 논 덕분에 등에 온통 화상을 입었는데 급하게 오느라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다. 지휘하는 내내 등이 어찌나 따가웠던지 남편이 뒤에서 째려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남편은 두고두고 이 일을 두고 마음 아파한다. 고작 학교 일 때문에 평생에 한 번뿐인 신혼여행을 잘라먹었다고 따가운 눈총을 보낸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아직도 그때의 인터넷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대전**초, 학생•새내기 교사 열정으로 전국소방 동요대회 금상 따. 지도교사 신혼여행 단축 등 열정 눈길. 지난 대회에서 동상을 땄던 **초가 올해 금상을 수상한 데는 합창부 학생들의 꾸준한 노력 못지않게 지도교사의 열정도 한몫했다. 올해 처음으로 합창부 대회 지도를 맡은 콩 교사는 **초가 5월 지역 예선에서 대상을 받아 2년 연속 대전 대표로 전국대회 출전권을 따내자 평생 한 번뿐인 중요한 연수와 결혼 일정까지 조정하는 열의를 보였다. 콩 교사는 여름방학 동안 진행된 1급 정교사 자격연수 기간에도 짬을 내 합창부를 지도했다. 이 연수는 출석 점수와 시험 등 일정 요건을 갖춰야만 자격을 얻을 수 있어 녹록지만은 않은 연수다. 특히 콩 교사는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결혼식을 올려 신혼의 단꿈에 빠져들어야 했지만, 대회 참가를 위해 신혼여행 일정도 단축하는 열성을 보였다.’
남는 것은 이 기사 몇 줄 뿐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학교 행정의 관례상 내가 직접 작성했다. 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이 따갑다.
임용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올린 결혼식이었다. 맘고생하며 8년 연애 끝에 골인하게 된 결혼식이었다. 그날 하도 신부가 웃어서 모두가 나보고 딸을 낳을 거라고 했지만 정작 아들만 둘을 낳았다.
결혼하고 바로 다음 해에는 영어 심화 연수를 신청해서 6개월간 교육받았다. 그중 한 달은 뉴질랜드에서 홈스테이 하며 그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경험하고 실제로 수업도 했다. 정말 6개월간 원 없이 영어 공부하고 영어책을 읽었다. 그러자 가장 꼴찌로 연수원에 들어갔던 내가 나올 때 일등상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나의 피나는 노력에 대한 대가였다. 영어 실력이 좋아졌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열심히 한 기억뿐이다.
그다음 해에는 영어 전담을 하면서 수업 연구대회에 처음 나가 2등급을 받게 되었다. 정말 너무나 행복한 3년이었다. 남편과 연애하면서 그렇게 놀았으면서도 더 제대로 놀기 위해 3년간 아이는 일부러 가지지 않았다. 방학마다 여행 다니고 마트에서 과자 잔뜩 사다가 실컷 먹고 16평 작은 집에서 둘이 알콩달콩 재미나게도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지 3개월 만에 정말 아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