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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복의 꿈

by 콩소여

누구나 어렸을 때 한 번쯤은 세계 정복의 꿈을 꾸지 않을까? 우리 아들들은 스파이더 맨이나 아이언맨이 되어 악당과 싸우는 역할에 몰입하곤 한다. 나도 어릴 적에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유명한 무술인이 되어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홍콩 액션영화를 보며 무예를 익혔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중국무협드라마 판관포청천을 보며 정의감에 불타오르곤 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늦은 밤 판관포청천 시청을 금지시키시자 그 화를 참을 수 없어 벽에 주먹질을 해대다 구멍을 뚫는 불상사도 있었다.


아버지는 딸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에 늘 말씀하셨다.


“여자도 무술을 배워서 자기 몸 하나는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영웅놀이는 초등학교 5학년, 태권도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욱 불이 붙었다. 그전까지는 달리기를 하면 늘 6명 중에 4~5등을 하곤 했었는데 태권도를 다니고 1등으로 치고 올라왔다. 6학년 체력장에서는 여자 중에 유일하게 특급이 되어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잠깐 배운 태권도로 급 상승한 자신감에 급기야 어떤 남학생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요 며칠 시비가 붙어 투닥거리던 남학생과 운동장에서 일대일로 싸우게 되었다. 배운 대로 자세 잡고 상대방을 노려보며 서로 빙빙 돌았다.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려 발차기를 시전 했으나 상대방도 만만치 않았다. 돌려차기로 연신 내 허벅지를 때렸다. 내가 발로 찬 것보다 맞은 기억만 난다. 확실히 실전은 타격감부터가 달랐다. 태권도장에서 겨루기를 할 때는 맨발로 서로 발차기를 주고받는데 실전에선 흙 묻은 운동화로 얻어맞는다. 눈주위가 붉어지더니 어느새 내 볼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팠다.


“야, 무슨 여자랑 싸우냐?”


주위 친구들의 야유에 얼굴이 시뻘게진 그 남학생은 이겨놓고도 고개를 푹 숙이고 집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난 뼈아픈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영웅의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난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꿈이 바뀌었다. 남자가 되고 싶었다.


사실 그즈음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고 가슴이 나오면서 2차 성징이 누구보다 빨리 찾아왔다. 5학년때 생리가 시작되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생은 여드름 바이러스라 놀려댔다. 외모 콤플렉스가 생겨 앞머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리 크지도 않은 가슴도 붕대로 꽁꽁 싸매고 다니고 싶었다. 그 때문에 자꾸 움츠리고 걷다 보니 어깨가 굽었다. 어머니께서 볼 때마다 허리를 펴고 걸으라고 나무라셨다. 그래도 난 굴하지 않고 가슴축소 수술을 찾아보곤 했다. 그냥 절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꿈과 현실의 괴리감에 내 욕구는 열등감으로 정체성을 심하게 혼돈하며 타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 같다. 외모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남자가 되고 싶었고, 남자가 되지 못하면 남자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말투, 행동 모든 걸 남자처럼 흉내 냈다. 왠지 남자애라면 다리 하나쯤은 부러져 봐야 할 것 같아서 놀이터 그네 프레임 위에서 뛰어내리기를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다리 부러지기가 쉽지가 않았다. 목발 짚고 절뚝이면서 학교에 가면 너무나 멋져 보일 것 같았다. 마치 영웅이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부상당한 몸으로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의 이런 남자가 되고 싶은 간절한 몸부림도 진짜 남자 같은 여자애가 나타나면서 시들해졌다. 그 아이는 전교회장이었는데 입은 옷 스타일, 말투, 머리스타일, 듬직한 성격까지 모두가 다 그냥 남자였다. 여자아이들은 우르르 그 아이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나의 남자 놀이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그 아이 소식을 싸이월드에서 접했다. 엄청 짧은 치마에 여자여자하게 꾸미고 다니는 사진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도 한창 화장하면서 꾸미기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아들의 엄마가 되어 한 집에서 세 남자와 살고 있다. 워터파크 놀러 가서 나 혼자 여자 탈의실로 향해 떨어져 걸어가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모든 걸 함께 한다. 아니 함께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한 심리검사에서 나의 전통적인 여성상에 해당하는 점수가 굉장히 낮다고 나왔다. 남성성이 강하다나? 남편은 이 소식을 듣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자기는 남자랑 살고 있는 것이었다며 신세를 한탄했다. 요리를 제외한 모든 집안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는 남편이기에 그냥 옆에서 어쩌냐고 같이 안쓰러워해준다. 남자, 여자 구분 지을 일이 뭐가 있나. 그냥 한 집안의 가장으로, 한 인간으로 존중해 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래도 앞으로 양말은 뒤집어서 빨래통에 꼭 넣어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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