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나까지 다섯 명이 함께 놀았다. 여성스러운 지윤, 새침데기 채은, 무용을 하는 결이, 재미있는 지오, 그리고 남자 같은 나. 이렇게 성격도 제각각인 5명은 ‘독수리 오 형제’처럼 중학교 생활을 서로 의지하며 재미있는 추억을 많이 쌓았다. 한참 친구 관계에 민감한 나이에 네 명의 친구들은 지구 방위대처럼 든든한 나의 보루가 되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은이가 헐레벌떡 뛰어와 말했다.
“야, 우리 반 애들 예쁜 순서대로 순위 매긴 게 있는데 내 얼굴이 4위래.”
투덜대며 말했지만,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자기는 언제나 제일 예뻐야 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애였다.
“어디? 어디? 난 몇 등인데?”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난 관심 없는 척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리고 내 순위를 확인하자마자 곧 충격에 휩싸였다. 뒤에서 2등.
“야, 이거 만든 애들이 자기들이랑 친한 애들은 죄다 10등 안에 적어 놓은 거야. 지네들 맘대로.”
친구들의 위로도 소용없었다. 그 애들과 친하지도 않은 채은이, 지윤이, 결이는 다 순위권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한 반에 여자들로만 42명. 나만 못생겼다는 뜻이었다. 객관적으로.
“걱정하지 마. 난 꼴찌야.”
지오가 넉살 좋게 말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오는 얼굴은 예쁜데 살이 쪄서 꼴찌가 되었다. 살은 나중에 대학교 가면 다 빠진다고 했다. 키가 더 크려고 살이 찐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상 지오는 키가 커서 그렇게 뚱뚱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날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태어나서 그런 모욕감은 처음이었다. 그냥 모르고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바람이 잎새에 스치기만 해도 까르르 웃는 나이에 내 외모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너그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막연하게나마 내가 그렇게 못생긴 편은 아니지 않을까 싶던 생각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난 못생겼구나. 못생겨서 나중에 결혼도 못 하겠네. 지긋지긋한 외모지상주의. 외모까지도 등수를 매기는구나. 그때 그 못된 계집애들의 장난을 혼쭐 내주고,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아니 그 당시엔 어차피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을까?
사실 그즈음에 학원에서 예쁜 애들만 좋아하는 사회 선생님이 나와 같이 앉은 친구를 매일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하곤 하셨다. 자습 시간마다 앞에 와서 한참을 그 친구의 어디 어디가 예쁘다고 칭찬하다가 문득 옆에 앉은 내가 의식이 되었는지 날 보며 말씀하셨다.
“음.. 우리 콩소여는 참 욕심 있게 생겼어!”
아… 이게 무슨 말인가? 당시 내가 생각하는 욕심 있는 사람은 놀부, 팥쥐, 신데렐라에 나오는 새언니들, 뺑덕어멈뿐이었는데. 결국 어른이 보기에도 난 예쁜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언젠가 또 다른 친한 친구에게 얼굴이 못생겨서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때 그 친구는 진지하게 날 보며 말해주었다.
“아냐. 넌 눈, 코, 입 다 따로따로 보면 못생기지 않았어. 그냥 다 합쳐서 보면 평범해 보이는 거야.”
나를 배려하느라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했지만 평범하다는 것은 못생김을 뜻하는 말이다. 그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을 바로 후회했다.
그래, 난 못생겼으니 차라리 공부하자. 어느 순간 난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고 친구들은 그런 내가 재미없다고 가버렸다. 그렇게 공부만 하기 시작했다. 한창 누려야 할 꽃다운 나이, 사춘기 소녀 감성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오로지 공부밖에 모르고 살았다.
5학년때 성장이 멈추었지만 그때는 키가 더 클 줄 알고 교복도 3년 내내 크게 입고 다녔다. 친구들은 더 예쁘게 보이려고 치마를 줄여서 짧게 입고 다녔는데 난 어깨 뽕이 유달리 튀어나온 블라우스에 무릎 아래로 치렁거리는 치마를 입었다. 어쩌다가 엄마가 옷을 사다 줘도 귀찮다고 입어보지도 않았다. 그 당시 사진 속의 나는 늘 헐렁한 티에 펑퍼짐한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옷은 몸을 감추기 위한 용도인 줄로만 알았다. 내 인생의 암흑기는 고등학교에서도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난 못생기고 공부 잘하는 애였다. 그나마 중학교 까진.
*사진 출처: 레전더리 픽처스 콩: 스컬 아일랜드(2017) 영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