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거듭되는 후회와 자책으로 머릿속은 번개가 치는 듯 찌릿찌릿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미쳤지, 내가 미쳤어. 대체 왜 그랬을까?’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살면서 이토록 격렬하게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번복할까? 이것이 과연 옳은 결정일까? 심장이 떨리다 못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낮에는 두 아들과 복작대느라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롯이 혼자인 새벽은 지독히도 길고 끔찍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다락에 올라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채널을 의미 없이 돌렸다. 좋아하던 영화도 드라마도 단지 그냥 번쩍이는 불빛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해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제발 빨리 해라도 뜨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심코 본 시계는 고작 1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해 6월, 나는 가르치던 6학년 학급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렸다.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는 착한 아이들에게 한마디 언급도 없이 병 휴직을 신청하고 그야말로 허둥지둥 도망쳤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너무 열심히는 하지 마세요. 나중에 선생님이 다칠까 봐서 그래.”
“쌤은 너무 이상적이야. 현실은 달라요.”
라이프 스타일로 미니멀리즘이 대세라지만 내가 맡은 교실은 그야말로 맥시멈리즘, 교직 경력 십여 년 동안 쌓아온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만물상이었다. 반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고, 알려주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왜 자꾸 주변에선 안 된다고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열정이, 내 체력이,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고 싶다는데! 그러나 그 견고했던 생각이 허물어지기까지는 4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2월 준비기간, 그리고 3월 한 달간,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학급경영자료들을 총동원하여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학급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너무 열심히 가르쳤다는 핑계로 내 목소리는 한 달 만에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잠시 쉬어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모든 교육활동을 수신호에 의존해 며칠간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고작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 때문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주워서 버리면 되었을 것을. 그간의 노력에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 아이와 대립하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버렸는지……. ‘쓰레기를 버리는 건 너의 자유지만 선생님으로서 너에게 쓰레기를 주울 기회를 주는 거란다. 너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의무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끝끝내 자기에겐 아무 이득이 되지 않는다며 책임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아이와의 대립은 하루가 멀다고 이어졌다.
그 아이의 못된 말과 행동으로 인한 나머지 아이들과의 대립은 분명 그 아이의 과제였고 내 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제 분리가 그렇게도 어려웠던지 수시로 상처받곤 했다. 모든 활동에 그 아이만 열외를 해야 하니 마음속에 가득 품은 행복한 학급경영의 꿈은 자꾸만 멀어져 갔다. 내 욕심 때문이려니, 마음을 비우려 해도 잡힐 듯 말 듯 한 그 아이의 행동 때문에 자꾸만 포기되지 않았다. 점점 힘든 상황은 그 아이에 대한 미움으로 번져 나갔고 직장뿐만 아니라 가정에서까지 모든 일이 벅차 오기 시작했다.
반에 남학생들만 따로 불러서 집단 상담하는 자리에서 두 명 학생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다른 학생들이 그 둘을 말리려고 해도 너희들은 양심이 없다는 둥, 내숭 떨지 말라며 막무가내였다. 무기력함.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선생님한테 불만 없는 애들은 다 나가.”
어느 순간 판을 주도하던 학생이 다른 학생들을 내보냈다. 그 두 명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남학생 총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간신히 앞에 서 있던 교사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를 움켜쥔 채 차마 그 둘을 쳐다보지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다시 배워오세요, 선생님만 보면 자살해 버리고 싶어요, 길에서 마주칠까 봐 정말 끔찍해요, 규칙은 싹 다 갈아엎으세요, 그냥 첫날 선생님을 보는 순간 기분이 더러워졌어요. 너무 탄식이 나왔고 망했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선생님 너무 거지 같아요. 아침마다 학교 오기가 싫어요, 선생님 때문에. 진짜 선생님 우리 반에서 좀 나갔으면 좋겠어요. 진짜 다른 선생님 오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동안 학교 측에 몇 번의 도움을 요청했었다. 동 학년 부장님과도 상담했고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보건 선생님의 권유로 교권보호위원회가 임시로 열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부부 사이의 문제가 아닌지 솔직히 이야기해 보라는 둥, 그동안 몇 번의 지각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그 때문에 생활지도가 잘 안 되어서 그런 게 아닌지, 그동안 생활지도 자료를 가져와 보라, 자기 어린 자식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 학생들을 더 우선시해야 하지 않겠냐는 등의 말도 안 되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러다 툭. 끈이 떨어져 나갔다.
교사 연구실 바닥에 주저앉아 쓰레기통 옆에서 한참을 울었다. 동료 선생님들이 어서 조퇴하라고 챙겨줘서 주섬주섬 옷만 걸치고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울면서 남편에게 전화했고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던 남편은 나 대신 모든 뒷수습을 해주었다. 갑자기 담임이 없어져 어리둥절했을 반 학생들을 남겨둔 채 그렇게 병원에 갔다. 우울증으로 인한 적응장애 진단받고 약을 먹었다. 학교에서는 한 달 병가를 내주면서 다시 돌아오길 바랐지만 바로 병 휴직 6개월을 신청했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은 육아 휴직으로 또 1년째를 보내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 긴긴밤이 너무나 무섭게만 느껴지던 그 몇 주, 몇 달간 내가 했던 후회들은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한 후회였을까? 아니면 무모한 열정에 대한 후회였을까? 한동안 학교로 돌아가는 꿈을 매일 꾸었었다. 후회와 고뇌로 지새웠던 그 순간들은 어쩌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연단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것은 앞으로 내가 맞닥뜨리고 부딪혀야 할 교직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아니 앞으로는 이보다 더 큰 폭풍이 불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날의 경험을 쓴 약으로 삼아 더욱 강해져야 한다.
다행히 1년 6개월의 휴직 기간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정말 소중한 인연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나를 좀 더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응원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글을 쓰면서 내면의 힘을 회복하고 지난날의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이제 복직을 앞둔 이 시점에 어쨌든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뎌 보려 한다. 아직 길거리에서 중학생이나 그 또래 아이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든다. 또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난 더 단단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열정. 부디 그 사건으로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움츠러들지 않았길, 다시 한번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