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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년의 친절함이란

중 2 복이의 친절

by 눈항아리

초등 꼬마들은 작은 우산을 선호한다.

자신들의 짧은 팔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신체 능력 범위 안에 있는 우산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초등 어린이들도 큰 우산을 펼 수는 있다.

엄지 손가락 하나로 꾹 누르면 펼쳐진다.

뻑뻑한 것도 두 개의 엄지손가락을 모아 조금 힘주어 누르면

어느 날은 꽉 누르면 간신히라도 펼 수 있다.

다만 접을 때가 문제다.


우산을 펴면 꼭 접어야 한다.

접히지 않는 우산은 사용할 수 없다.

그것이 우산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팔 길이 문제라도.

팔이 짧은 데다 우산 대가 슬쩍 휘기라도 하면?


학교에 장우산을 가지고 갔다가

한 번씩 낑낑거리며 우산 접는 경험을 한 우리집 꼬마들은

그래서 작은 우산을 쓴다.



그런데 작은 우산이 안 보이는 날도 있다.

가게에 두고 오거나,

학교에 놔두고 잊고 오거나,

학원에 꽂아두고 오는 날이 태반이다.

우산의 생리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오던 비가 낮에 그쳤다면 혹은 밤에 그쳤다면

다음날 비가 올지 안 올지 생각지 않고

당시 날씨 상태에 따라 우산은 그저 잊히고 마는 것이다.


우산이 없다고 안 쓰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 있나.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가리려면 무엇이든 머리 위에 써야 한다.

팔 길이에 맞는 우산이 없다면

장우산, 미니우산, 찢어진 우산, 까만 우산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 중 가장 멀쩡해 보이는 것을 챙겨 쓰고 나가야 한다.



큰 아이들은 평소에는 그냥 비를 맞으며 차를 타는데

그건 보통 우산을 펼쳤다 접기 귀찮아서다.

차를 탈 때 잠깐이지만 우산을 접는 동안 비를 맞아야 하니

어차피 맞을 비를 그냥 조금 더 맞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꼭 우산을 써야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막내 복실이는 비 맞는 것을 무슨 재앙으로 생각하는 걸까?

어디서 산성비의 위험에 대해 배워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저 긴 머리가 축축해지는 게 싫은 것일까.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 차가 있는 마당까지

열댓 걸음 가는데도

꼭 우산을 펼쳐 쓰고 간다.

그냥 후다닥 달려 내려가면 좋으련만.

모자를 뒤집어쓰고 달려도 좋으련만.



어린이가 쓰는 작은 우산은 없는 날이었다.

복실이는 장우산을 두 손가락으로 꾹 눌러 펼쳤다.

성큼성큼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발을 딛자마자 몇 걸음 더 걸었을 뿐인데

벌써 차에 도착했다.

빗물로부터 안전한 우산 아래 공간에서 벗어나

손이 잠시 찬 비를 맞으며 자동차 문을 열었다.

그러곤 몸을 차에 넣기 전에 우산을 접어야 했다.

우산아 접혀라. 얍!

주문을 외면 좋겠지만.

접는 건 한 손으로 안 되는 일이라 두 손으로 모아 잡고

활짝 열린 차 뒷좌석과 더불어 오는 비를 다 맞으며

낑낑대고 있었다.


복실이가 든 장우산은 중고등 큰 아이들이 쓰는 정말 긴 우산이다.

거센 비가 내리는 날에도 성인 한 명의 몸을 완벽하게 가려줄 수 있는 크기다.

그런데 우산대가 살짝 휘어져 있어 복실이 힘으로 접기 힘들다.


내가 옆에 있었다면

당연하게 우산을 접어줬을 텐데.

나는 현관문을 막 나서고 있었고 복이는 차에 막 당도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복이는 차에 그냥 탈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냉정하고 동생들 골려먹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니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복이가 글쎄 복실이의 우산을 접어주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보기에도 아이가 우산을 못 접어 낑낑거리는 것이 안타까웠나.

버리고 탈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귀차니즘 복이가 웬일일까.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일까?


가까이 가보니

복이는 비열하고 고소하며 재미있는 얼굴로 복실이를 보며 실실거리고 있었다.

그 미소를 ‘썩소’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다.

거기에 아이를 놀리는 듯한 말을 덧붙였다.

“팔도 짧은 게, 이것도 못 접냐?”

도와주려면 곱게 도와줄 것이지

다섯 살이나 차이나는 막둥이 여동생을 골려먹는 게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오빠의 사악한 표정을 신경 쓸 겨를 없이 복실이는

우산이 접한 것에 안도하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우산을 집어 들고 차에 올라탔다.

당연하게도 고맙다는 말은 없다.

“엄마 오빠가 나 팔 짧다고 놀렸어!”

왜 도와주고 본전도 못 찾는 것인지.



위기에 처한 동생을 외면하고

홀라당 차에 올라탈 줄 알았는데

그래도 오빠라고 동생 챙기는 것이 대견했다.

우리 복이 그만하면 친절하다, 칭찬할만하다.

더 상냥하고 더 배려심 있는 오빠를 바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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