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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Jul 02. 2024

생강 모종 세상으로 나가는 날

생강 모종 만든 지 두 달이 되었다. 그동안 비닐하우스에 들고 나고, 창고에 넣고 빼고, 바퀴 선반을 만들어 옮겨주고, 차양을 쳐주고, 선풍기 바람을 쐬어 주었다. 퇴근 후 밤이슬 맞으며 물이 말랐나 보고 물 주기가 벌써 60여 일이다. 참 오래도 컸다. 잘 컸다.


손수 키운 모종을 들고 나오는 농부 아빠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다. 그동안 기울인 정성만큼 쑥쑥 잘 자란 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화분 가득 뿌리를 키운 아이들은 밭에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몇몇이 누런 잎으로 변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화분 흙에 양분이 없어 이제나 저네나 언제 밭으로 나가나 기웃거리기만 했다. 비바람에 고추 부러질까, 터널 아이들 돌보느라 늦어진 생강 심기다. 그래도 이만큼 자라줘서, 잘 기다려줘서 고맙다.



잘 정돈된 밭에는 풀이 없다. 당분간 경쟁자가 없으니 밭에 뿌리내리는데 힘겹지 않으리라. 덜 큰 자식 너른 세상으로 내보내는 애타는 부모의 심정이 이러할까. 얼른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고 거센 잡초의 위협을 떨치고 일어나 당당히 굵직한 생강을 만들면 좋겠다.


생강아 떨치고 일어나라!



작은 화분은 작고 답답했다. 내 그릇을 이렇게 작게 정해준 농부 아빠가 야속했다. 나는 땅과 하늘을 뻗어 나갈 창창한 젊음인데 하얀 뿌리는 흙을 가득 휘감고도 화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작은 화분 벽을 툭툭 건드려도 길을 열어줄 생각을 안 했다. 답답한 화분을 벗어던지고 처음 맡아본 들판의 싱그러운 바람 내음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하늘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고 하얀 발로 무른 땅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넓은 땅에 뿌리를 쭉쭉 뻗어나갈 앞날이 기대된다. 어둠을 뚫고 하얀 빛 땅굴을 파고 만들 내 세상, 내 집. 나는 어디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그건 생강이의 의지에 달렸다.

네가 가고 싶은 만큼,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네 발이 하얀빛을 내며 길을 만들어 주고

네 푸른 꿈이 하늘 길을 만들어 줄 테니



생강이는 꿈에 부풀어 있다. 생강을 줄줄이 들고 나오는 농부 아빠도 꿈에 부풀어 있다. 생강 10킬로그램 두 박스를 사서 100킬로그램, 열 박스를 수확할 꿈을 꾼다. 꿈도 야무지다. 꿈만 꾸고 일은 안 하면 좋을 텐데... 오늘도 농부 아낙은 도망 궁리를 해보지만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는 생강 심기. 시작!


남편 아빠 심을 간격을 정해준다. 한 발 건너 대충 심으면 될 것 같은데? 삐뚤하게 심는 걸 보느니 위치를 정해주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나 보다. 좀 삐뚜름하면 좀 어때서? 고춧대 박을 적에도 줄자를 가져오는 농부 아빠. 인터넷에서 배운 교육을 착실히 수행하는 그는 몇 센티미터가 중요하다. 작물의 간격은 센티미터를 자로 재야 한다.


농사지으며 줄자 찾는 농부 여기 있소!


성격이 생판 달라서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각자의 일을 한다. 일이 겹치지 않으면 서로 싸울 일이 없다. 그래서 늘 우리는 평화롭다.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기. 참견 말기. 그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다.


농부 아빠는 심는데 관심이 없다. 편리와 정확함, 깔끔함, 정돈된 밭을 원하는 그는 모종 들어갈 위치를 표시한다. 호미로 팔텐데 작고 얕은 구멍이 필요하지 않으나 정확한 위치가 그에게는 중요하다.


농부 아낙이 맡은 일은 생강 심기. 농사의 하이라이트 되시겠다. 그러나 생강 양이 많다. 빨리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쪼그리고 호미질하기 힘들어 엉덩이 의자를 꺼냈다. 세기의 발명품. 엉덩이 의자. 높아서 조금 허리를 굽혀야 하지만 낮으며 땅에서 기어오르는 벌레의 습격을 빠르게 받을 수 있으니 좀 높은 것으로 엉덩이에 달았다. 꼿꼿이 서면 엉덩이에 달고 뒤뚱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남사스럽다. 하지만 고랑에 앉아 세월아 네월아 호미질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농부 아낙의 허리와 다리에 무리를 덜 준다. 농부 아낙이 깔고 앉아 누르는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지만 충전제가 탄탄하니 잘 받쳐주어 괜찮다.



조금 심다 뒤돌아 보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앞산 뒷산도 살피고 시원한 바람도 맞아 본다. 구름이 피어오르는 회색 하늘이 멋들어진다. 의자도 편안하고 들판에 앉아 이런 호사가 다 있구나. 땡볕에 심을까,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비 온 후 구름 낀 하늘 아래 바람이 좋다. 잎이 시들어 가는 감자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파먹을 감자를 보니 풍요로움이 한가득이다. 오이, 호박도 주렁주렁 열렸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라는 고춧대도 훤칠하니 멋있다. 먹을 것이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니 배가 부르다. 날도 좋고 배도 부르고 하늘 아래 너른 들판에 돗자리 깔고 한잠 자면 좋~~겠다!


농부 아낙 정신 차리시오. 이제 일을 해야지.



흙 묻은 장갑을 다시 낀다. 호미로 흙을 파낸다. 화분보다 더 깊고 넓게 판다. 비 온 뒤 축축한 흙이라 물을 안 줘도 되니 참 좋다. 화분 뒤꽁무니를 왼손으로 몇 번 살살 누른다. 뒤집어서 오른손으로 흙과 모종을 받아낸다. 흰 뿌리가 가득이다. 싹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히 들고 파낸 흙 속에 집어넣은 다음 다독여준다. 농부 아낙 생강을 심는다. 호미만 있으면 된다. 심은 화분은 휙 버리고 간다. 나중에 정리하면 되지 뭐.



다 심고 나서 화분은 나중에 골을 빠져나가며 정리하려고 했다. 정말 주워가려고 했다. 나중에! 깔끔이 농부 아빠 그새를 못 참고 어지러이 널려 있는 화분을 줍는다. 바람에 날아간다는 둥, 내년에 또 쓸거니 구기지 말라는 둥 작은 소리로 말해보지만 농부 아낙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도 않고 쭉쭉 앞으로 간다.


꼼꼼하고도 알뜰한 성격 하고는.


눼눼.


속으로만 대답하고선 빈 화분을 한 곳에 모으며 생강을 심는다


이번에는 심고 나서 흙을 정리 정돈하라고 한다. 흙이 어지러운가? 원래 흙은 마구 어지러운 것이다. 비가 오면 정돈이 될 텐데 굳이? 흙은 정리를 안 하고 두둑을 장홧발로 꾹꾹 밟아놓고 앞으로 쭉쭉 심으며 나간다. 일은 스피드가 최고다. 대충 막 심는 건 절대 아니다.


농부아빠는 정해진 위치에 착실히도 생강 모종을 놔주었다. 친절하다, 멋지다 농부 아빠! 억압에서 벗어난 생강이 들아 네 꿈을 펼쳐라!


이열 종대로 해쳐 모엿!


생강을 이열 종대로 네 줄 심었다.


그래도 밭이 남았다. 아이고야. 빈 밭에는 또 뭘 심나. 장마 전에 모두 들깨를 심는단다. 농부 아빠는 또 밭을 간다.

깻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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